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녀 (문단 편집) ==== 궁녀의 수 ==== [[영웅호색|제왕이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다]]는 관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고대 중국인들은 제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고 말했다. 고대부터는 크거나 많은 것을 가리킬 때 백, 천, 만, 억 등의 숫자로 비유했으며, 그런 관념에서 나온 말이지 실제 숫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채호]]는 [[백제]] 최후의 날에 낙화암(落花巖)에서 투신한 여자들을 왕후와 왕의 첩들과 태자의 처첩이라고 여겼다. 또 [[사비성]](泗沘城)의 인구가 5만이고 [[조선]] 궁녀의 숫자가 6백 안팎이라는 점에서, "사비성의 면적과 인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 정말로 삼천궁녀가 존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14년에는 수십 명이었다고 하는데 관습적으로 20~30명을 의미한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 시대 100명에 근접했고 [[인조실록]](仁祖實錄)에 “환관과 궁첩의 수가 점점 많아져 내관이 160명, 나인이 230명, 별감(別監)이 150명”이라는 내용을 보아 당시에는 230명 정도였던 것 같다. 많아져서 그렇다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200명 안팎이었던 모양이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에는 "3백 궁녀의 하례를 받았다"고 표현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6백 궁인도 부족하다"고 말했고,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당시 궁녀가 684명이라고 했다. 들은 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600~684명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즉, 1681년 300명 정도인 궁녀가 56년 뒤인 1737년 600명 이상이 되었다는 것은 세 왕의 재위기간 동안 궁녀가 급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녀를 모으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영조실록]]에 따르면 신료가 "궁녀가 너무 많다"고 자주 항의한 것 같다. 하지만 왕실에서 불법적으로 양인조차 끌어들였던 기록을 보아 궁녀 명부에 올리지 않은 궁녀들이 여럿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사간원]](司諫院)에서 불법궁녀가 많다고 따져서 출궁한 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궁녀가 급증한 것은 1670년~1671년에 있었던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해석되기도 한다. 궁녀 자체가 3D라 평소에는 상당히 기피되는 직종인데, 이 시기에는 한반도에 빈번히 일어나는 재해들로 인해 그냥 굶어죽느니 궁녀로라도 들여보내는 게 서로간에 나을 지경이 돼 궁녀기피 현상이 크게 줄었다. 일종의 구휼 차원의 증원이기도 했다는 뜻. 후기로 가면 궁궐 상황이 안 좋아져서 2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범법자들이 숨어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하면 역모에 연루된 자들까지 포함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