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병 (문단 편집) === 궁병의 특징 === 궁병의 존재 이유는 창칼로는 커버 못하는 원거리 무기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활의 가격은 재질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중갑과 금속무기보다는 저렴했다. 문제는 소모품인 화살이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하는데 돈이 깨졌다. 궁술 역시 백병전을 익히는 훈련보다는 훨씬 단시간 내에 습득이 가능했기 때문에 전사계층이 아닌 징집병들도 빠른 기간 내에 기본적인 사격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http://www.youtube.com/watch?v=nINK8Z_YHb8|참고 영상]] 일반적으로 투사무기들이 근접무기에 비해 교육기간이 짧은 편이다. 활은 모든 투사무기 중 배우기 어려운 편에 속하나 조준 사격의 명중률을 따졌을때 그런거고, 개개인의 명중률도 전쟁에서처럼 집단으로 운용할 경우 탄막을 펼치는 식으로 어느정도 보완이 된다. 이는 총기가 등장했을때 머스킷병의 보병전술과도 상통한다. 일개 징집병들이 전장에서 [[레골라스]]마냥 뛰어다니고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입문 자체가 싸게 먹힌다는 거지, 조준 사격하는 명사수로 훈련시키려면 이쪽도 비싼 건 매한가지였고, 화살도 소비량이 심각한 주제에 제대로 된 재료로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유지비는 제법 들었다. 따라서 궁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부농이나 상인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냥꾼, 혹은 전문용병이 담당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전쟁시에는 활이 아닌 집에서 쓰던 농기구나 혹은 나무를 깍아서 만든 [[몽둥이]](클럽,스태프)로 무장하였다. 궁병이 보편화 되기 전인 고대에는 이 자리를 투창병이나 투석병이 차지했는데, 이 경우에는 활에 비해 무기인 [[투석구]]의 제조와 투척할 돌멩이 수집은 활과 화살에 비해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없을 정도로 쉽고 싸게 준비 가능하며, 위력에 대해서도 활을 능가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활을 능가하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소수의 전문가[* 고대에는 로도스섬 투석병과 발레아레스섬 투석병이 유명했다고 한다.]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 지방에서 영국이 궁수 양성을 위해 수시로 활쏘기를 장려했던 것처럼 평시에 투석을 즐겼던 지방[* 우리나라의 경우 안동과 김해의 투석병들이 유명했는데, 이들은 한국의 전통 연례행사인 석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에서 전시에 동원하는 일종의 예비군 방식으로 비교적 대규모로 충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까지는 이러한 군제가 다수 있었으나 시대가 지나며 궁병에 비하면 편제상으로 휠씬 줄어들게 되었다. 기계식 활인 [[쇠뇌]]의 경우 활과 투석구를 모두 아득히 상회하는 무지막지한 위력[* 활에서 발사된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평균 200J에 해당한다. 그러나 쇠뇌는 최대 1000J에 해당하는데, 이는 머스킷 탄환의 기본 운동에너지와 흡사하다.] 그리고 현대의 총처럼 걸어놓고 나서(장전) 편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기에 활에 비해 익숙해지기 굉장히 쉽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기계장치가 추가된 활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반 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 방법이 복잡하고, 덕분에 만드는 기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억소리나게 비싼 가격도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에 지급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관계로(훈련 시간은 훨씬 짧지만) 중세 유럽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비중 있게 쓰인 적은 많지 않았다.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쇠뇌를 많이 사용했고 그 품질은 [[당나라]]에서도 높게 쳐줄 정도였다. 당나라에서는 전군의 3분의 1을 궁수 겸 쇠뇌수들로 채울 정도로 비중을 높게 두었다. 이들은 단순한 궁수들이 아니라 적이 접근하면 창을 들고 대응하는 다목적 보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활이든 쇠뇌든, 궁수 양성에는 많은 시간이 들기 마련인데, 여기에 비용([[화살]][* 화살은 훈련에서든 실전에서든 소모/분실되기 매우 쉽다. 그리고 예나 지금(1발당 2~3만원)이나 재료/인건비가 무척 비싸다. 그렇다고 비용 아끼겠답시고 화살을 싸구려로 막 만들면 안 쓰느니만 못 할 정도로 조악한 물건이 되어 버린다. 화살은 공기역학적으로 굉장히 섬세한 물건이다.])도 많이 드는 탓에 질 좋은 궁수부대를 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잉글랜드나 조선, [[터키]] 등에서 궁수부대를 편제하기 쉬웠던 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활쏘기를 즐기는 문화 덕이 매우 컸다. 특히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는 기마사격(기사, 騎射)은 굉장히 고급 기술이며, [[몽골]] 등 북방기마민족처럼 기사 자체가 어려서부터 생활화된 민족이 아니면 대규모 기마궁수 양성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었다. 많은 매체들이 궁병들은 오직 활만 갖고 다니며 그 탓에 원거리에서는 유리하나 근접전에서는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병이라고 해서 활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국 궁사들은 상당수가 꽤 잘 사는 편이었으므로 [[갑옷]]도 잘 장만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국 궁사들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프랑스]] [[기사]]들에게 근접전을 걸어 뼈와 살을 분리해놓은 경우도 있고, 그 외에도 적국 보병이 영국 보병대를 부수고 영국 궁병대에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궁병 부대에게 근접전에서 발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전문적으로 양성된 인력이 있을지언정 병과에 따른 구분이 세분화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정말로 중무장할 여건이 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 기사들이 대놓고 거렁뱅이 집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갑옷이 부실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이들이 이질 등으로 고생하는 중이라 갑옷이 있었더라도 입을 여건이 안됐다는 것과, 이렇게 비웃었던 기사는 평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갑옷이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웬만큼은 챙겨입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기사가 궁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세시대에 그린 전투화를 보면 궁병들이 부무장으로 칼이나 메이스 같은 철퇴를 상비하고 있고 정 안되면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몽둥이라도 장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궁수들에게 칼이나 철퇴 그것도 아니면 육모방망이로 부무장 시켰다. 예초에 조선이나 중국을 제외하면 활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재력이 소비되었고 주로 앞에서 말한대로 재력있는 부농이나 상인 혹은 전문용병이나 사냥꾼들이 궁병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냥꾼이 활만 들고 다니는 것도 매체의 왜곡이다. 위험한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람들이 활만 들고 사냥하는 경우는 없다. 사냥하다가 늑대나 곰을 만나게되면 활로 상대하는데 한계가 있어 활뿐만 아니라 창이나 단검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냥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북병들이 총이나 활만큼 창도 잘 다룬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총탄이나 화살이 빗나가면 바로 창으로 바꿔 들고서 목표물의 심장을 귀신같이 찔렀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대로된 활과 화살도 제작-유지 비용이 많이 깨진다. 거기다 궁병 1명이 들고 다닐수 있는 화살 수도 많아야 100개 미만이었고 화살이 떨어지거나 적이 근접했을 경우를 대비해 부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소총 말고도 권총이나 군용나이프를 지급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최악의 경우 보조 무기로 적과 싸우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궁수는 일반적으로 근접전에서 적과 맞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는데다, 좋은 갑옷은 보병에게 지급하는 것도 모자랄 판이었기 때문에 궁수가 좋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또한 너무 무거운 갑옷은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되므로 경장을 선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궁병대는 민소매 갑옷을 입고 투구가 아닌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소매 있는 갑옷은 활쏘기에 방해가 되며 투구는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위에서 애기한대로 양판소처럼 일반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려]]~[[조선]] 시기의 [[한국]]의 궁수들은 갑옷을 비교적 잘 갖춰 입은 편이었다. 실제로 고구려 때완 달리 고려~조선 시기에 주류를 차지하던 갑옷 양식인 [[포형 갑옷]]은 활을 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였고, [[갑사(역사)|갑사]]를 비롯한 조선의 궁수들은 방호력이 좋은 갑옷을 갖춰입고 다녔다. 활도 근접전이 가능한 무기로 조선무과 시험중 하나가 근접사격 시험이었다. 조선시대 무인들의 기록을 보면 심지어 근접전에서까지 활을 썼으며 화살이 떨어지면 자결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탄금대 전투]] 때 [[신립]]의 일화가 있다. 신립은 활을 어찌나 많이 쐈는지[* 아마 본인 화살만 쏜 게 아니고 적군이 쏜 화살도 뽑아서 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서[* 이게 뭔 소린가 하겠지만 조선 전기에 가장 흔하게 쓰이던 숫깍지의 경우, 강궁을 당기기에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쐐기가 어중간하게 조였거나 풀릴 경우 구조상 활을 쏠 때마다 엄지 부분이 쓸려서 굳은살은 기본이고 관절에 멍이 들 정도로 엄지 부분에 자극이 심하다.] [[남한강]]에 뛰어들어서 손을 식혔다가 나오길 9번이나 반복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최후엔 [[익사|남한강에 투신]]했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대포진성 전투]]에서 전사한 [[윤흥신]]의 경우, 신립과는 달리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결하진 않고, 대신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하는 [[최후의 발악]]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조선이라도 이런 [[기행]]이 아무 병사들이나 가능한 것은 아니며 애초에 칼도 차고 다니는 만큼 필요하면 백병전도 치뤘다. 상술한 탄금대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전사한 [[김여물]]의 경우,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적들에게 돌격해 [[부월]]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붙잡혀 죽었으며, [[이시애의 난]] 때 전사한 신면([[신숙주]]의 아들)도 화살이 다 떨어지자 활을 휘어 꺾어버리고[* 정황상 적이 노획했을 때 못 쓰게 하려는 것으로 추정.]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다가 죽는 등 조선시대 무인들이라고 해서 화살이 다 떨어졌을 때 무조건 자결만 하는 건 아니고 근접무기 들고 개돌한 케이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상대가 어느정도 접근했다고 무조건 활을 안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생각하면 될 듯? 애초에 멀리서 쏘든 가까운 데서 쏘든 활에서 나간 화살은 사람을 죽인다. 거기다 자신이 활밖에 없다고 순순히 죽어주는 사람은 더욱 없다. 거기다 가까운 데서 활을 쏘면 활의 저지력과 관통력이 강한 상태에서 맞추는 것이라, 관통되지 않더라도 저지력 때문에 상당히 귀찮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knight vs warbow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