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성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45년 8월에 이르러 일본은 그야말로 [[세기말]]이 55년 일찍 찾아온 분위기였다. [[추축국]] 진영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물론 실질적으로 추축 동맹을 주도하던 [[나치 독일]]이 항복했고 일본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나라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괴뢰국]]들과 [[동남아시아]]의 [[태국]]이 전부였으며 심지어 태국조차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뒤통수를 치면서 친[[연합국]] 행보를 보였다. 당시 세계 3위의 해상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제국 해군|제국해군]] [[연합함대]]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네임드 항모 네 척[* 카가, 소류, 히류, 아카기]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1942~43년에 벌어진 [[과달카날 전역]]의 소모전에서 갈려나갔고 억지로 재정비한 전력조차 1944년의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해전]]으로 궤멸되었으며 잔존 세력조차 [[구레 군항 공습]]으로 소멸했다. 모든 해외 점령지와의 통상(通商)은 단절되어 일본 본토는 식량을 포함한 모든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상황 속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해 [[몰락 작전|미국의 본토 침공]]이 현실화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일본 군부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고 조건부 항복의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이미 일본은 미국에 저항할 수단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으로 승리가 바로 눈 앞에 있는 미국이 일본의 터무니없는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일 리도 만무했다. 사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진 1944년 말부터 [[소련]]을 통해서 항복을 위한 물밑 교섭을 시도하고 있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포츠담 선언에 대해 일본은 항복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문제는 그 물밑 교섭과 답변은 일본측의 항복 조건이 1.천황제 유지, 2.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 3.개전 이전의 식민지 유지를 인정해주기 등등 총 4가지 조건부 항복이었다. 당연히 연합국이 이 조건을 받으려면 일본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엄청난 피해를 주거나 역공세로 어느 정도 연합군 점령지를 일부 다시 되찾는 등 백중세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전세는 연합군의 압도적 우세였던 상황에서 패전에 가까운 당사국임에도 마치 승전국 위치에 있는 듯한 황당무계한 내용이었다. 결국 시간이 길어지면서 연합국은 일본을 더더욱 압박하기 위해서 [[히로시마시|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이 내세운 조건 중 유일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전후 천황제 유지 하나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위의 무리한 천황제 유지 외 3가지 조건을 건 이유가 천황제 유지만 걸면 연합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진정한 목적인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연합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건 것 아니냐는 관측도 존재한다. 원래 연합군의 실세 [[미국]]은 [[천황]]은 적국의 수괴이니 천황이 존재하면 일본을 점령해도 [[빨치산|파르티잔]] 같은 게릴라가 기승할 것을 염려하여 [[일본 황실]] 자체를 폐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점령 후 일본을 통치하려면 정신적인 상징인 일본 천황을 살려서 얼굴마담으로 앉힌 뒤 GHQ가 통치하는 방식이 낫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겨우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호작전|본토결전, 1억 총 옥쇄]][*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등의 인구 포함.], [[신주불멸]] 등을 외치던 [[일본군]] 수뇌부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일본군도 [[핵분열]]에 대해 알고 있었고 [[니고연구|무기화를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 무수한 난관에 부딪히면서 핵무기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많은 개발비가 들어가야 하는지 체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핵폭격을 하는 것을 보고 완벽하게 좌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핵무기 개발조차도 육군과 해군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어떠한 자료 공유도 없이 완벽하게 따로 실시했다]].]와 [[소련]]의 [[소일전쟁|참전]]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 속에서 [[쇼와 덴노|히로히토 덴노]]의 결단 하에 '천황제 유지'를 목표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최후의 1인까지 항전하여 천황을 결사옹위하고 [[귀축영미]]를 몰아내자는 [[극우]] 군인들은 여전히 항복 결정에 반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