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예 (문단 편집) === 재평가와 폭군 논란 === [youtube(r-XH5emmIKA)] >하지만 이런 역사는 이제 다시금 바꿔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주 경략의 주역이 [[왕건]]이 아닌, 궁예임을 입증하는 당시 전라도 고승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탑비 내용이 최근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 >선각대사는 당나라에서 10여년 유학한 뒤 귀국한 당대의 큰스님. 고려 건국 이전 왕건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이를 시기한 궁예에 의해 태봉국 수도 태봉(철원)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 교수는 '''비문 내용을 정밀 판독한 결과 10세기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원정하고 비석의 주인공 선각대사를 태봉국에 데려간 이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86853.html|“나주 경략 주역은 왕건 아닌 궁예”]] >그러나 새로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태봉의 국왕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법경대사(경유·慶猷)비문을 통해서 908년에도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했고, 무주 근처에 은거했던 경유를 만난 궁예의 요청으로 태봉의 수도로 갔다는 점이 파악되었다. > >'''두 비문은 기존 사서보다 먼저 기록된 1차자료. 이 자료들은 나주와 무주에 대한 공략계획과 지휘를 궁예가 했고, [[왕건]]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의 자료들은 왕건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또한 궁예에 관해서는 기성의 불교와는 다른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사상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하지만 궁예는 형미와 경유의 예처럼 선종 승려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 >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형미의 비문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왕건의 선종 승려들에 대한 우대는 궁예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 >'''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이 왕건의 업적으로 제시하는 태봉의 남부공략은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았다.'''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04/2011070400005.html|"남부 경략은 궁예가… 왕건은 과장돼"]] 현대에는 마냥 [[폭군]]만은 아니었다라는 주장도 일고 있다. 즉, 후대에 궁예를 몰아낸 [[고려]]([[왕건]])측에 의해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왜곡되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궁예가 부인 강씨와 그 두 아들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 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 것도 아니었거니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강씨와 그녀의 두 아들을 앞세워 순군부를 설치해 호족들의 군권을 뺏으려던 궁예의 왕권 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추측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을 숙청하는 일과 해괴망측한 [[불경]]을 저술한 것도 당시 교종에 익숙한 불교계에 선종을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으면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고려)|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 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 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준의 상서문에 궁예는 1경의 토지에서 6석을 세금으로 수취하였으며, 이에 반해 왕건은 천하통법인 1/10세를 기준으로 1부의 토지에서 3승을 수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예와 왕건의 세금 부과기준이 경과 부로 단위기준이 상이함에 착안하였다. '''궁예는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많은 수취를 하였으나, 1경 이하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면세를 해주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왕건은 3/10세를 1/10세로 감면해준다는 조치를 표방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토지를 많이 경작하는 호족과 호족의 관반에게는 유리한 조치였으나 토지를 적게 경작하는 농민들에게는 불리한 조치였던 것이다.''' > >궁예의 면세조치 혜택을 받은 농민은 어느 정도였을까를 알아보기 위하여 궁예의 전제권력 강화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통하여 전제권력을 강화하면서 호족들의 농민 직접지배권을 점차로 중앙정부로 귀속시킴에 따라 면세혜택을 받은 농민들도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김주성,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139 - 157 (19 pages) >선각대사비에 전라도 지역을 원정한 후 선각대사를 泰封으로 모셔간 인물로 나오고 있는 大王은 지금까지 고려태조 王建으로 생각되었지만 비문의 전후 맥락을 고려할 때 태봉의 국왕이었던 弓裔로 확인된다. 후에 선각대사를 처형하는 大王과 동일 인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선각대사비에 의하면 大王 즉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羅州와 武府(광주) 등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였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궁예의 親征사실은 형미와 함께 雲居道膺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慶猷의 행적을 기록한 法鏡大師碑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던 경유 역시 이 지역에 원정 온 궁예를 따라 태봉의 수도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들 자료로 볼 때 현재 『삼국사기』와 『고려사』등에서 왕건의 업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태봉의 전라도 남부지역 경략은 실제로는 궁예의 직접 지휘 하에 행해졌던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태조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던 것이다.''' > >'''선각대사비와 법경대사비에 보이는 궁예의 선종 승려에 대한 우대 조치는 궁예의 불교정책에 대해서도 재검토하게 한다.''' 지금까지 궁예의 불교정책은 주로 미륵신앙이나 토착신앙 등의 신비적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왔지만 두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궁예는 선종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종교 정책의 특징이라고 생각된 선종 승려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도 실제로는 전임자인 궁예의 정책을 계승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선각대사비는 나말여초 시기의 불교사는 물론 정치적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미 많은 연구들에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해석상의 작은 착각으로 인해서 자료가 담고 있는 정보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였다. 이 자료는 후대의 사서에 말살되어 버린 궁예의 행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보다 면밀히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碑를 통해 본 弓裔 행적의 재검토, 최연식,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제7호, 2011.06, 203 - 222 (20 pages) >후삼국 시대의 궁예는 왕건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역사 속에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 궁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궁예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긴 자의 편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에,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통치를 했던 철원지역에 구전되는 설화는 궁예에 대한 상반된 가치 평가를 수반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지만, 대체로 궁예를 긍정적인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궁예에 관한 진실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궁예 관련 역사 기록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궁예에 관한 구전 설화 역시 설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그 문맥의 의미를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궁예와 왕건에게서 유사한 탄생의 이야기를 볼 수 있지만, 궁예의 신비로운 탄생은 상서롭지 못한 징후로 판단되어 궁예의 불행한 삶의 근거로 작용하고, 왕건의 경우 전형적인 영웅의 탄생으로 판단된다. 유사한 탄생 비화에 대한 이런 상이한 해석은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예이며, '''궁예에 대한 역사의 악의적인 횡포라고 할 수 있다.''' > >'''역사 기록은 특히 왕건이 세력을 확장하여 궁예를 전복시킬 즈음부터 궁예의 비인간적인 포학무도한 면을 부각하는 서술에 치중하고 있다. 궁예의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기술은 왕건이 고려태조로 등극한 사실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한다. 즉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과 잔학함은 왕건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다.''' 반면에 왕건에 대한 역사의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평가는 과장되었다고 볼 만큼 매우 호의적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이 집권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을 위해 설화적 서술을 활용하기도 한다. > >'''그러나 철원지역 궁예 관련 구전 설화의 전승자들은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이라든가 백성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혹평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혹평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철원지역에서 궁예는 나라를 세웠다가 몰락하고 패배한 인물이었지만 백성들의 편을 들어줄 민중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던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예의 죽음을 비장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으로 승화시키고, 또한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신라시대 신분의 장벽이었던 골품제도를 없애고 백성들을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는 논평에 가까운 전승자들의 진술은 궁예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실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최웅,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 301 - 330 (30 pages) 무엇보다 '''궁예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과 그 후손들이 기록한 [[고려]]측의 기록들 밖에 없다.''' 즉, 본인들의 역성혁명과 왕조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며 실제로 학계에서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 같은 1차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궁예에 대한 고려측의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등 고려측이 남긴 궁예에 대한 여러 기록들에 대해서 반론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즉,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실제로 학계내에서도 꽤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06) , (김주성,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 다만 위와 같은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통설에 반박하는 학설들일뿐 기존 통설을 완전히 폐기하고 대체하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먼 훗날에 관련 연구 자료들이 더 쌓인다면 궁예에 대한 기존 통설도 바뀔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통설이 완전히 폐기되고 대체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은 유념 할 필요가 있다. 궁예가 나주를 직접 공략했다는 선각대사비의 내용도 공략의 주체인 '대왕'의 해석을 왕건이 아닌 궁예로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당시에 왕이 궁예였기 때문에 '대왕'은 궁예를 가리킨다는 정도의 해석에 불과하고 비문에서 이미 궁예를 '전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대왕'을 왕건으로 해석하면 [[형미]]가 왕건의 권유로 그를 따라갔다가 궁예에게 미움을 사서 처형됐다고 볼 수 있고 후대의 고려왕들에게도 '대왕'이라는 표현은 궁예가 아닌 왕건에게 하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궁예의 나주 공략설은 전체적으로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궁예가 직접 나주에 간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주는 통일이 될 때까지 고려와 후백제간의 공방전이 수차례 있었던 지역이고 이미 903년과 909년에 걸쳐 왕건이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에 912년에 궁예가 직접 한번 친정했다고 해서 왕건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궁예의 불경 제작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궁예가 불경을 스스로 썼다는 것 뿐이다. 그 내용이 정말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에게 일갈하는 [[간지폭풍]]의 내용일지, 아니면 궁예 자신을 [[최고존엄]]의 미륵불로 신격화하기 위한 헛소리로 가득찬 [[불쏘시개]]에 불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절대적인 왕권 강화로 나가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20세기의 군사, 공산 독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동시에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듯이. 하지만 애초에 귀족 중심 불교를 타파한다면서 정작 기존 미륵 신앙의 본산인 법상종과 피를 뿌리면서까지 척을 진 시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궁예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상종은 기본적으로 교종 종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대중 중심이라던 정토종조차 분류상으로는 교종에 들어간다. 왕으로서의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상대 종파에 대해 피를 볼 정도의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결국 궁예의 교리가 대중적으로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일 뿐이다. 민간의 궁예 전승들과 신앙을 예로 들어 반박할 수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궁예의 민간 신앙의 경우 그것이 [[단군]]이나 [[고려]]의 [[강감찬]], [[공민왕]], [[최영]], [[조선]]의 [[이홍위|단종]], [[남이]], [[김덕령]] 같이 전국적으로 널리, 그리고 많이,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 아닌, 겨우 [[경기도]] [[안성시]] 그것도 몇몇 산골 마을들에 한정돼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라 이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또 그 과정에서 조카인 단종을 포함해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정분, 허후 등의 [[계유정난]]의 희생자들과 이후 [[사육신]]과 그 일행들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일행 등에게 고문과 학살들을 자행해 백성들에게 매우 큰 미움을 받은 [[수양대군|세조]]가 일부 지방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어 이걸 가지고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한참 떨어진다. 이에 비해 [[이홍위|단종]]은 [[단군]], [[공민왕]]과 더불어 한반도 역대 왕조시대의 군주들중 민간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신으로 숭배되는 임금이라는걸 감안하면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누굴 지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철원]] 지역의 민간전승의 경우도 궁예에게 좋은 민간 전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의 곤암산 전설이나 또 궁예가 궁예의 왕후로 둔갑한 [[구미호]]에 홀려 재위 기간에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와, 한 대신이 이 '구미호'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잡으려 다리가 3개밖에 없는 전설상의 신비한 개인 삼족구를 구해 구미호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심지어 이 사건 이후 궁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무당]]이 18세된 여성의 유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식인|인육을 먹었다는]], 철저하게 고려의 입장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궁예전보다 더한 만행도 구전되어오고 있고, 또 고려말에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손자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손자라는 이야기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조작되고 일어난 '김저의 옥사', '윤이, 이초의 옥사'와 더불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신랄히 비판한 사안이고 또 오늘날의 한국 역사학자들도 조작이라고 보는 [[공민왕]] 말기 자제위 사건이 연상되는 궁예가 [[강비|자신의 아내]]와 [[왕건]]을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이야기와 또 이후 왕건에게 축출되어 쫓기게 되었을 당시 한탄강의 곰보돌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 지역의 민간 전승들이 궁예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들을 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져 민간의 궁예 신앙과 궁예에 대한 민간 전승들을 가지고 무조건 궁예가 [[폭군]]이 아니고 비운의 창업 개혁 군주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궁예가 내세운 교리가 그 정도로 백성을 위한 혁명이었다면 적어도 궁예에게 우호적이던 [[철원군]] 지역에서는 궁예의 교리가 최소한 구전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을텐데 오늘날 궁예의 경전이나 설법은 단 한 가지도 전해지는 것이 없이 앞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오히려 철원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시]]에서 궁예 [[미륵]] 신앙이 드문드문 발견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 집행[* 자의적 법 집행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암살이나 역모와 같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적어도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경감시킬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무고를 입증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적어도 누군가의 제보(그것이 참소이든 아니든)나 그간의 행적과 같은 나름의 증거라도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인 숙청 방식인데 관심법에 의한 숙청은 그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권력층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스트레스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과 공포 정치로 패서 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그 숙청의 와중에 자신의 친위세력을 육성하는 방법은 고작 청주를 비롯하여 중앙에서 먼 옛 백제계 세력들에 대한 우대 정도였으며 명주의 순식은 여전히 독립 제후 수준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후계자들까지 씨를 말려버렸다. 후사야 다시 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비가 죽은 915년 궁예의 나이는 이미 46세다.(869년설을 따를 경우. 857년설의 경우 58세)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육성시킬 궁예의 수명 자체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정비 소생의 아들 둘을 스스로 죽여버린 것이다. 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에서 태자를 핍박하긴 했지만 끝내 죽이진 않은 [[광종(고려)|광종]]과 비교된다. 이쯤되면 궁예의 목적이 순수하게 왕권 강화에 있었긴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정비야 그렇다 쳐도 후계자인 '''적자들까지 죽여야 할 정도의 위협에 시달리는 궁예 정권이 과연 백성의 지지를 제대로 얻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정당한 어린 후사를 살해한 군주치고 민심이 고운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로 왕위를 가져갈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다. 궁예가 아무리 폭정을 했어도 명주나 청주에 지지세력이 남아있던 만큼 원래대로라면 반란세력도 왕자를 옹립하는 작업을 해야 했겠지만, 후계자 둘이 모두 궁예에게 직접 죽으면서 자연스레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왕건이 손쉽게 왕위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폭군 논쟁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 있는데 바로 '업적이 있으니' 혹은 '국가를 이룰 정도의 능력을 보이고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으니',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또 '왕조를 창업한 군주'이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업적 있음 = 무조건 폭군 아님이 아니다'''. 아무리 업적이 있어도 통치의 방식이 폭압적이라면 충분히 폭군의 범주에 들어간다. [[한나라]] [[한고제|고조]], [[신라]] [[신문왕]], [[고려]] [[광종(고려)|광종]], [[명나라]] [[홍무제|태조]], [[조선]] [[태종(조선)|태종]]처럼 강력한 [[숙청]]을 동반한 급진적 왕권 강화책을 쓰는 군주 모두가 폭군은 아니지만 이들이 폭군으로 불리지 않거나 재평가를 받는 것은 적어도 백성에 해당되는 피지배층에게는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러한 숙청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 한고조 유방의 경우와는 달리 지나친 숙청 정책으로 오늘날은 물론이고 그가 태조로 있었던 명 왕조 기간 동안에도 폭군이라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려 광종의 경우도 재위 기간 동안에 벌어진 대숙청으로 인해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여기던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그가 고려의 국왕 중 1명으로 대접받던 고려시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문종 때에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 고려 전기 대학자였던 [[최승로]], 고려 후기 목은 이색의 스승이였던 익제 [[이제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 방금 위에서 언급된 군주들과 달리 딱히 대숙청이나 학살 등을 하지 않고 그저 백성들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가혹하게 부려 먹기만한 [[수양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다.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논리는 혁명 직후에도 몇 달 동안 세쿠리타트가 저항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사망 이후 [[소련]] 공산 정권 하에서 직접적인 격하 운동까지 벌어졌는데도 추종자들이 많았던 [[스탈린]], 전 인류 공공의 적으로 공인받고도 [[네오 나치|추종자]]들이 날뛰는 [[히틀러]],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고도 지금까지 [[중국]]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신격화되는 [[모택동]] 같은 사례들에 비춰보면 설득력을 잃는다. 그런데 궁예는 매우 직접적으로 백성의 삶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다. 바로 그가 추진한 '''[[철원]] 천도'''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에서 제기하는 대로 민본사상과 애민정신을 가진 군주였다면 구태여 철원 같은 말도 안 되는 입지에 백성들을 몰아 넣으면서까지 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건설을 강행하면 물론 호족들이 물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면서 왕권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당하고, 또 호족들과 달리 직접 수도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다. 게다가 철원 천도는 그냥 천도도 아니고, '''이제 막 건설한 송악을 간단히 버리고'''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지어 강행한, 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였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수양제]]의 낙양 건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막장 정책이다'''. 당연히 호족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민간에 대한 수탈과 과중한 부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천 년 뒤인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의 경우 처음에야 지배층의 헌금이 주였지만 결국에는 [[당백전]]과 도성 통행세 등 갖은 무리수로 이어졌다. 도시도 아니고 그저 궁궐이었음에도. 궁예의 종교 탄압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압정치의 사례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쌀]]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또한 정변의 수장 [[왕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지역의 옛 [[고구려]] 지역의 패서계 호족의 맹주였으며 옛 수도 송악을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가 집권하면 철원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철원은 전근대 관점에서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광복 직후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이 통과하는 문제로 생긴 일. 일제강점기 초 [[경원선]] 철도가 부설되며 철원은 서울~원산의 중간점이자 인근 이천, 평강, 김화 등 강원도 서북권의 교통 거점은 물론 [[금강산선]]을 통해 [[금강산]] 관광의 거점 역할까지 하는 교통의 요지로 성장했으며, 1940년대만 하여도 38선 이북 강원도에서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은 철원 한 곳 뿐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로동당 강원도당도 철원에 있었다. 그런 [[철원]]이 궁예 당시에 수도 노릇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라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불완전한 입지는 궁예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는 최소한 자신의 절대 권력 수립을 위해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공포 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임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 행동들을 보면 개별적으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틀에서 봤을때는 모순이 발견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즉 궁예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는 설이 괜히 나오는 이유다.''' 납득할 수 없는 궁예의 이상성격에 드라마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불행히도 이런 궁예의 이상성격은 [[편집성 성격장애]][* 타인의 행동이 악의에 찬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등 불신과 의심을 일삼는 성격장애]의 한 단면이다. 공포 정치를 자행한 시점에서 폭군의 요소는 충분하며,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 철원 천도에 이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폭군이다. 다만 [[수양제]], [[해릉양왕]], [[연산군]] 급의 톱클래스 폭군이 아니고 다소간 개인적 능력을 재평가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 폭군 여부를 따지자면 [[수양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남진 평정에 참여했고 끝끝내 대운하를 완성시키는 등 능력은 꽤 준수했던 사람이니 폭군에서 빠져야 한다. 한 가지 정상참작을 하자면 궁예의 경우는 당시 신라 말기는 급격히 몰락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궁예 역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점과 무리한 왕권 전제화에 대해서도 [[내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부분은 참작이 된다. 또 하나 궁예에 대한 변호 논리 중 하나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는 난세속에서 갖은 고초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마음이 매우 굳세지는 이유로 폭군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양제(수)|수양제]]의 경우를 들면, 그는 아버지 [[수문제]]처럼 창업 황제가 아닌 [[수나라]]의 수성 황제였지만 제위 등극 후 폭정을 저질러 나라와 수 왕조와 자신을 망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양제(수)|수양제]]의 경우, 그가 황제로 즉위했을때, 이미 [[수나라]]는 통일이 다 된 상태였고, 수양제는 뒤를 이어 수성을 해야할 판국에 되려 폭정과 전쟁을 벌인 통에 처참히 멸망했으나 궁예의 경우는 아직 통일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내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궁예와 비교되는 인물은 [[중국]]의 경우, [[진나라]] 말기의 [[항우]]와 남북조 시대의 북조 전진의 황제 [[부견]]과 남조 [[양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도 다들 초기에 나름 잘나갔다가 시간이 갈수록 실정을 저질러 끝내 망했던 인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직언을 듣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꽤나 비슷했다. 또한 '항우'의 경우는 궁예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탁월했으나, 대신에 궁예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부견의 경우는 궁예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비수대전]]에서의 엄청난 실책을 보여 대패해 몰락한 것을 보면 이는 견훤이 [[고창 전투]]에서 대패해서 몰락한 것과 비슷해서 부견의 경우는 궁예보단 견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양무제'의 경우가 궁예랑 비슷한 케이스에 근접하는데 둘 다 불교를 혹신했고, 실정을 했을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양무제는 항우나 수양제, 궁예 같은 폭정을 저지른 폭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인자한 성군이었지만 지나친 불교에 대한 혹신과 이로 인한 불교계의 극심한 부패, 그리고 지나치게 어질기만 한 정치로 망한 케이스로 소위 '인자한 창업 암군' 스타일이지, 항우 ,수양제, 궁예 같은 '창업형 폭군' 스타일은 아니였다. 또 비록 당 왕조의 창업 군주는 아니지만, 원래 황제가 될 처지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어 사실상 창업 황제의 성격이 강한, 우리에게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너무나 유명한 [[당현종]]의 경우, 정변을 일으켜 [[당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를 제거한 후 제위에 올라 이후 군사를 일으켜 [[태평공주]]를 제거해 [[측천무후]] 사후,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여성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후 재위 전반과 중반까지는 [[개원의 치]]로 불리는 눈부신 선정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중 하나를 구가했지만 재위 후반에 초심을 잃고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 같은 총비와 간신들에게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국 [[안록산]]의 대규모 반란으로 민심을 잃어 아들인 [[당숙종]]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심지어 그 이후 아들인 숙종에게 시해당했다는 의혹까지 강하게 받고 있다. 즉, 궁예 같이 초심을 잃어 망한 창업군주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창업 군주는 위에서 이야기된 이유들 때문에 무조건 어질고 유능하고, 절대 무능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근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라, 독립영웅으로 칭송받던 사람이 독립국가의 최초 지도자가 된 이후 독재로 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괜히 미국의 조지워싱턴이 존경받는것이 아니다. 한국도 4.19 혁명이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승만이 상당기간 독재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그냥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패배자인 궁예가 폄훼됐을 것이라거나, 아니면 가족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폭군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냥 기록을 1차원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흑백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궁예에 대한 평가에는 나말여초의 정치적 혼란상과 주류층 호족들의 이합집산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 왕조 초창기만 해도, 혜종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죽었고 정종도 석연치않게 요절했을 뿐만 아니라, 광종 또한 호족들을 숙청하고 편집증에 걸려 친족까지 엄청나게 죽이다가 자기 아들까지 죽일 뻔했지만 정작 오늘날 광종이 폭군이라는 평가는 하지 않지 않는가? 이는 한국사의 호족이 북두의권에나 나올법할 세기말 군벌이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호족들의 무법성이 최고조에 달한 후삼국 시대라면 당연히 고려를 해야하는 사항일 것이다. 후삼국 호족들의 무법성과 횡포는 후대의 고려 왕들도 신경병증에 시달리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광종은 이에 맞서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으로 1차 대처를 했지만 적어도 광종은 정치적 명분을 확실히 가지고 한 것이다. 그러고도 반역을 걱정해 계승순위가 높은 왕족들을 죽여야했다. 이마저도 광종의 자질이 비범하여 가능했던 것이지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잡을 정도의 일신의 무력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공로로 1등을 달리던 혜종조차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요절하게 만들 수있는 것이 호족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궁예는 그 호족들을 처음부터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신정일치와 감시통제라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다가 민생을 파탄내어 실패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