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예 (문단 편집) === 현대의 평가 === 궁예가 꽤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나라를 건국했다'''는 업적은 한국사에서도 몇 안되는 인물만이 이룩한 업적이며 후삼국시대 이후로 새 왕조가 탄생하는 과정은 모두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견훤은 조상 시절부터 신라 왕궁 근위대를 제공해오던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15살 때부터 서라벌에서 군생활을 시작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동원력이 궤를 달리했고, 왕건은 대호족의 아들로서 기반 세력이 시작부터 있었다. 하지만 궁예는 사실인지도 의심스러운 왕족의 후예라는 것 말곤 기반이라곤 하나 없던 승려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를 돌이켜봐도 위대한 장군이나 군사 지도자로서 위업을 달성한 인물들은 많으나 그 인물들 중에서 나라를 직접 세운 업적을 달성한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궁예의 군사적 능력이나 리더쉽 자체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신정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후예라면서 세를 모으던 다른 국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출발해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과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여러 세력들을 규합했는데, 대호족이었던 [[왕륭]]은 아예 자기 지역을 수도로 삼아달라고 했으며 [[왕순식]] 또한 궁예에게 바로 항복하고 평생동안 충성을 바치다가 궁예 사후에도 '''왕건에게 대놓고 반역자라면서 반항하는''' 등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자체는 꽤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 정변 이후에는, 으레 구 지배 체제를 격하하고 업적 같은 것들을 깎아내리는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태조(고려)|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전주(大王前主)"라고 일컬어졌다. 즉 당시 국왕('''대왕''')인 왕건 즉위 이'''전'''의 군'''주'''라는 의미. 이 호칭은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 세력의 비중이 [[태조(고려)|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까지도 궁예의 영향력이 꽤나 남아있었다는 추측의 반증이 된다.[* 궁예의 충신이었던 [[왕순식]]만 봐도 궁예가 이미 사망한 이후에도 충성심을 유지하여 왕건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짓을 하면서 대들었지만 왕건은 왕순식을 건드리지 못했다. 왕건은 왕순식의 아버지였던 [[허월]]을 보내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왕순식이 922년에 아들을 먼저 보내 귀순 의사를 밝히고 928년에야 공산 전투 이후에야 왕순식이 직접 왕건에게 찾아가 완전히 귀순한다.] 그러나 말년의 치세가 파멸을 불렀다는 점 또한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왕전주로 호칭되기는 했으나 '''반란으로 폐위된 군주들도 받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호조차 받지 못하고''' 무덤마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에서 그의 취급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다. 계속된 연구로 궁예의 악행이 후대에 의하여 조작되었을수 있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궁예의 악행은 명백히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역사서에만 기록되어 다른 증거를 찾기 힘들어 과장 되었을지 모르는 악행을 다 제외하더라도[* 왕권 강화를 위해 사람들을 죽인 것이 대표적으로, 현대 기준으론 잔악한 악행이지만 세계사에서 새로운 왕국이 생기면서 구세대를 숙청하는 일은 빈번했으며 당시 기준으로선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오히려 자기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필요악인 행위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건국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해 [[왕씨 학살]]을 벌인 역사가 있다. 왕씨 학살 또한 명백한 악행이지만 결과적으로 고려 부흥 운동의 싹을 잘라버려 불안요소를 없애버림으로서 왕권 강화를 이룩했다.] 건국 명분으로 삼았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철원으로 수도를 무리하게 옮긴데다가 나중에는 미륵 신앙을 내세워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정국가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그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 것'''은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로 날조 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철원 천도는 유적이 남아 있는 명백한 사실이며 후삼국시대 당시 백제를 국호로 걸었던 후백제와 멀쩡히 살아있는 신라가 있는 와중에 고구려의 후예라면서 걸었던 고려라는 국호를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갑자기 자기가 미륵이라는 헛소리를 해대면서 수도까지 옮긴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젋은 시절엔 성군이었다가 말년엔 폭군으로 타락한 지도자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에도 수두룩한 것을 생각하면 젋은 시절 성군이었던 궁예가 말년에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가 후대의 날조 때문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며, 궁예가 잘못된 통치를 가한 폭군이었다는 정황증거가 훨씬 넘쳐나기 때문에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계승하지 않았다.''' 왕건은 궁예의 미륵 신앙도 버리고, 철원성을 버리고 송악으로 돌아가는 등 궁예 시절에 세운 것을 대부분 무시했으며 고려라는 명칭은 궁예가 나라를 세울때 처음 쓴 국호이지만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호가 장수왕 시대부터 고려로 바뀌면서 그걸 그냥 가져다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궁예와는 별 상관이 없다. 왕건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역성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고구려 호족들의 불만과 아직 남아있는 친 궁예 세력의 불만을 동시에 잠재울수 있는 국호가 고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궁예가 치성광여래 신앙,[* [[북극성]]에 대응되는 위치인 치성광여래를 신성시한다. 그런데 북극성은 동아시아에서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다.] 법상종의 [[미륵 신앙]], [[도교]] 사상[* 도교에서는 [[단오]](음력 5월 5일)를 황제의 숫자가 겹치는 날로 본다. 그리고 태봉 시절의 사찰 이름인 발삽사(勃颯寺)에서는 토성에 대응되는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한 궁예가 사용한 연호 중 하나인 '수덕만세'는 오덕종시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형미]]와 같은 선사를 한때나마 중용했던 것을 보면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은 가졌을 여지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들의 인식 속 궁예는 드라마 <[[태조 왕건]]>의 [[궁예(태조 왕건)|궁예]]{{{-2 ([[김영철(배우)|김영철]] 분)}}}의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궁예(태조 왕건)#대중적 인식|궁예(태조 왕건)]] 문서 참조. [[철원군]]에서는 [[국부|군부(郡父)]] 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의 철원군 지역이 태봉의 수도가 되면서 이후 태봉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