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노갑 (문단 편집) == 생애 == 1930년 2월 28일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안동면 송천리(현 안동시 송천동)에서 아버지 권치삼(權致三, 1870 ~ 1932)[* 족보명은 권덕수(權德洙).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과 어머니 [[밀양 박씨]](1906 ~ ?)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으나 곧,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목포시|목포부]]로 [[http://news.donga.com/3/all/20140621/64490008/1|이주했다]]. 그래서인지 [[김홍일(1948)|김홍일]]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비례대표로 이적한 [[1996년]]에 잠시 국민회의 안동 을 지구당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3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홀어머니가 곧바로 재혼을 해 [[이부형제]](아버지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고 한다. 그 뒤 1949년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 1953년 [[동국대학교]] [[경제학과]]{{{-2 (49학번)}}}를 각각 [[졸업]]하였다. 이후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목포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래서인지 영어에 능통하여 [[동교동계]]에서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는 통역 일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최근에는 동시통역사에 도전한다든가 동시통역대학원 과정에 갔다든가 하는 소식들이 있었고, 2013년 8월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어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국대학교/대학원|동국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김대중]]의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김대중의 계파인 [[동교동계]]에서 [[한화갑]]과 양갑으로 불리며 정치 활동을 했다. 여느 정치 계파나 다 그렇겠지만, 동교동계라고 해서 또 다 같은 동교동계는 또 아니다. 권노갑의 경우에는 김대중의 정치 초기부터 가신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통 동교동계의 좌장이자 구파의 대표자로 불렸고, 한화갑은 신파로 분류된다. 후에 새천년민주당 정풍 운동 당시 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신구파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는 16대 대선 정국까지도 이어진다. 다만, 권노갑과 한화갑 개인의 사이는 좀 더 이전부터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박정희]] 정권 때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조작 때 [[고문]]을 포함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최영철(1935)|최영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치러진 199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경북 안동을지구당위원장과 경상북도지부장을 맡았다. 정권교체 이후 안동을 지역구 현역 의원이던 [[권정달]]의 영입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00000000578/3/70000000000578/20140621/64490008/1|권노갑 회고록 중]]. 1997년 [[한보 사태]]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81299|#]]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출소하고 잠시 [[일본]]에 머무르다가 귀국하여 2000년 [[새천년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었지만, 200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후 [[정동영]]을 필두로 일어난 정풍운동에 밀려 결국 사퇴해야 했다. 권노갑은 DJ의 모든 조직과 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DJ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대선 과정 중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직함도 없었지만 당정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특히 DJ의 자금까지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파워는 실로 막강했고, 자연스럽게 [[동교동계]] 전체에서 김대중 대통령 다음가는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이런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로 1월 1일에 권노갑 집 앞에는 1,000명이 넘는 인파가 새해 인사를 하러 몰려가 권노갑의 집으로 향하는 일대의 도로가 모두 마비될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으며. 권노갑의 아들과 큰딸 결혼식에는 수천여명의 하객이 몰려 발을 디딜 틈이 없었고, 화환이나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어떻게든 그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는 하객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2002년 진승현 게이트 사건으로 구속되고, 이어 2003년에는 [[현대그룹]]으로부터 200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재판 결과 진승현 게이트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40222/61100725/1|3]], 현대그룹 사건으로는 징역 5년형이 확정되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98609#home|#]] 이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15&oid=052&aid=0000125141|2006년 특별감형]]을 받은 데 이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01544870|2007년 2월 특별 사면으로 출소하였다]]. 그 후로는 2선으로 물러나 [[민주당(2008년)|민주당]]과 그 후신 [[새정치민주연합]]의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12214|문재인 대표 시절 재보선 지원유세에도 나서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 전 대표에 비교적 호의적인 입장이었으나, 2016년 1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지지를 선언했다.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있었으나, 2018년 야권발 정계개편에서 안철수 대표의 통합에 반발하여 [[이훈평]], [[정대철]]과 같은 동교동계 원로들과 함께 [[민주평화당]]의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에 [[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500928|복당한...]]줄 알았으나 이해찬 대표가 [[유시민의 알릴레오]]에 출연해 총선 전에는 입당을 불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2021년 재보궐선거]] 때 [[https://www.thepublic.kr/news/newsview.php?ncode=1065597295662650|타 전직 국회의원 115명과 함께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2022년 1월 13일 [[이재명]] 후보의 대사면에 따라 5년 만에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고 3월 22일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이후 돌고돌아 다시 상임고문이 된 것. ~~역시 집나가면 고생.~~ 2022년 5월 24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8회 지선]]에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등판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524138900001|#1]] [[http://www.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642|#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