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문세족 (문단 편집) == 권문세족 개념에 대한 회의론 == 13~14세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권문세족이라는 세력 및 이들과 신진 사대부의 대립 구도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의견도 많아졌다. 굳이 그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문세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의견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일단 '권문세족'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세족은 맞지만 권문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몇 대에 걸쳐서 관직을 장악한 주요한 집안은 있었지만, 이들이 원과 연계해서 중앙 권력을 독점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가 일고 있는 상태. '재상지종'이라는 것도 그냥 유력 가문에 가깝고, 파평 윤씨나 해주 최씨 같은 가문은 문벌귀족 시절부터 원래 잘 나가던 가문이었다. 권문세족을 규정하는 집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 권문세족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이 전부터 세력이 크던 가문들과 원나라에 동원된 하급 고려인 가문들, 고려왕을 따라갔던 고려인 환관 또는 시종들의 신진 세력들이다.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으면서 [[양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결국 그것이 중앙 재정의 궁핍으로 이어졌다는 서술은, 권문세족에게 보다 공격적으로 서술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16~17세기 경의 [[양반]]의 생활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양반과 뚜렷이 구분되는 권문세족의 문제점도 있다. 유력 세도가들은 강과 산을 경계로 땅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따라서 토지 소유의 규모는 권문세족 쪽이 훨씬 컸다고 볼 수 있겠다. 권문세족 자체가 기존 고위 귀족들도 있었지만 소수의 하급 관리이면서 왕의 측근으로서 고위 관직에 있게되어 힘을 기른 권문세족들이 기존 무신정권에서 무신들이 농장을 늘린 것처럼 농장을 늘렸고 기존에 농장을 가지고 있던 고위 귀족의 땅까지 빼앗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르는 토지 개혁론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애초에 무신정권기, 더 길게는 문벌 귀족의 집권기까지 올라가는 이야기이고, 소위 '[[신진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3세기부터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개혁론은 활발해지고 있었다. 흔히 [[신돈]]의 개혁 기구로 알려진 [[전민변정도감]]은 이미 고려 [[원종(고려)|원종]] 때부터 설치되어 7번에 걸쳐 존폐를 거듭했고, 녹과전을 지급하면서 수조권을 건드려 보려고 했던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조권 문제의 기본은 실질적으로 땅을 지급받을 수 있는 관료의 수보다 실제 관료의 수가 지나치게 팽창했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었다. 문신이란 문신은 죄다 썰어버린 [[무신정권]] 초기 이후 중앙 행정이 크게 위축되면서, 무신정권 후기부터는 문신을 다시 등용하는 한편 지방 세력을 위무하여 행정에 이용하거나 중앙에 끌어들이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13세기에 이르게 되면 다양한 지방 세력의 활발한 중앙 진출로 나타나며, 이것의 부작용으로 관료층이 오히려 비대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연히 '세족'들도 늘어나면서, 수조권 증가가 더욱 폭증했다는 것이다. 권문세족에 대한 회의는 신진 사대부와 이들을 대비시켰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신진 사대부의 출신 계층은 대체로 ①무신정권 이후로 최우에 의해 등용된 신관료층('능문능리' 계층) ②지방 중소 지주, 향리 세력 등이 진출한 세력 ③기존 권문세족이 전환한 세력 등으로 설명되는데, 문제는 ①의 경우 권문세족과 출신 상 다를 바가 없고, ②의 경우 신진 사대부의 기반이 중소 지주층임을 확인할 길이 거의 없는 데다가 향리 세력의 경우 과거급제를 통해 권문세족으로도 활발히 진출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13세기까지, 권문세족과 사대부 세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논의가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게다가 13 ~ 14세기 초반까지 '신진 사대부의 효시'로 평가되었던 인물들도 상당수가 세족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박전지]], 홍언박 등 이미 권문세족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들은 물론이요, [[안향]],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82|백이정]], [[이제현]] 등의 인물은 아예 [[원나라|원]]에서 수학하고 온 인물들이다. 대체 어느 중소 지주가 그나마 권문세족에게 침탈받는 재산을 기반으로 원나라에서 유학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러한 이들 중에는 원나라에서 관직에까지 오른 인물들이 있다. '친원 세력'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권문세족보다 오히려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다. 또한 [[신진사대부]]자체가 기존 하급 관리였고 재산도 적었던 고려인 권문세족보다 더 많은 재산을 이미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였으며 하급이며 재산이 적었던 몇몇 고려인 권문세족으로 인한 신진 사대부의 땅과 재산의 갈취가 충숙왕과 공민왕의 토지 개혁을 일으키도록 하는 신진 사대부의 반발이였다고 본다. 흔히 신진 사대부는 과거를 중시했고, 권문세족은 음서를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권문세족 측에서도 오히려 과거에 많이 응시했다.[* 음서의 경우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 부모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모두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혜택을 못받은 나머지 자식들은 과거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고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에서 입지를 펴 나가는 것이 대표적인 경로였다. 게다가 음서를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과거로 관직에 진출한 자들의 상당수 또한 권문세족이었다. 세족 집안의 출신 지역도 전기에는 개경 중심의 집안들이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삼남 지방이 중심이 된다. 또 한가지 권문세족에 대한 편견 중의 하나가 권문세족은 [[유교]]적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과거시험 문과 합격자의 많은 수가 권문세족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연구 결과 [[정도전]], [[조준(조선)|조준]] 등 조선 건국의 주요 인물들까지도 가문을 따지고 들어가니 '최소한 예전에는 한 가닥 했던 집안들'이 많았고, 존 던컨[* John B. Duncan. 조선 왕조의 기원.]의 연구 결과 아예 조선 초기 관료들도 권문세족 집안 출신이 많았다. 14세기부터 이미 신진 사대부 집안과 권문세족이 활발하게 통혼하기도 했다. 즉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구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4 ~ 15세기 고려와 조선 사이의 격변을 폄훼할 이유는 없으며, 유학적 사고관에 따른 개혁론이 한반도에 큰 격변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일단 14세기부터 남부 지방에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여 과거 응시자의 하한선이 내려갔고, 13세기까지 [[혜심]] 등에 의해 주도되던 유교와 불교 사이의 타협론이 침몰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에 대한 중시는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여기에 공민왕 대가 되면 [[성균관]]의 개혁이 마무리되어 [[이색(고려)|이색]], [[정몽주]] 등의 인사가 과거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를 상징하는 좌주 - 문생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권력을 지탱하던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어느 정도 융화되어 기존 세력과의 타협으로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압력 정도만이 주어졌다면, 14세기 중엽부터는 그 압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중앙도 스스로 비대해지면서 그 중앙에서 얼마만큼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명 교체와 홍건적, 왜구 등으로 인해 한반도가 받던 압력이 촉진제가 되었고, 마침내 요, 금, 원의 압력과 무신정권의 세파까지도 모두 이겨냈던 고려 왕조가 새로운 왕조로 재탄생하는 격변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포인트는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 친원과 반원의 이중 대립 구도를 지양하자는 것에 있다. 애초에 출신 성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고려-조선 교체기에 토지 문서를 싸그리 불태워 버리고 정도전은 국가의 평균적인 토지 분급을 주장할 정도로 사회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며, 굳이 권문세족이 쓸려 나가야 신진 사대부가 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론들은 존 던컨 등이 주장하는 비교적 신흥 학설이며 아직 주류 학설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이 [[식민사관]]이 강조해온 정체성론으로 회귀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목적을 위해 역사적 관점을 끼워 맞출 수는 없지 않냐는 시각도 있다. 다만 존 던컨 교수는 정체성론은 부인한다고 밝히고 있다. 좀더 냉정하게 말해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신흥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게, 던컨이 이런 주장을 한 지 30년도 더 됐지만 이런 학설은 주류에 편입은 안되어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결구도는 여전히 통설이고 던컨의 주장이 그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교과서에는 여전히 위의 일반 학설이 권문세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다루고 있다.[* 다만 기득권의 자제들이 공부하면서 사회의 문제에 고민하다가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는건 역사적으로 흔한 사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기 미라보 백작 같은 사람이 있다.] 다만, 던컨의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결 부정론이 기존의 통설에 비하면 신흥이론이긴 하다. 기존의 통설이라는 게 늦어도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벌써 세상에 등장한지 반 세기 이상 지난 이론인지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