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상하 (문단 편집) === 계속되는 낙향 === [[갑술환국]] 때 관직을 사퇴했다 1698년에 호조 참의로 복직, 그리고 이조 참의로 승진해 세자시강원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를 겸했다. 다만 1701년 장희빈이 주도한 저주 사건으로 남인이 없어질 때 낙향한 것을 보면 이번에도 관직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 1704년 특명으로 호조참판으로 승진,이조참판, 찬선을 거쳐 또 1705년 사퇴했는데, 대사헌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퇴한 것이다. 1716년까지 해마다 대사헌으로 제수되지만 계속 거부했다. 7년만인 1712년, [[한성부판윤]]과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5년 뒤엔 [[좌찬성]]으로의 승진 뒤 [[우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에도 임명되었지만 거부하고 물러났다. 1716년에는 권상하의 스승 중 한 명인 유계와 [[윤선거]]가 같이 저술한 <가례원류>와 관련되어 논란이 일었다. 시간이 흐르고,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자신의 스승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에게 책을 내고 싶다며 원고를 요구했으나, 매우 불괘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유상기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이명]]에게 부탁해 어명을 받았고, 윤증은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내줬다. 뒤에 모든 사정을 알게된 윤증과 유상기 사이에 편지가 오갔고, 윤증이 죽자 [[노론]]계인 그와 정호에게 발문과 서문을 부탁했다. 숙종은 소론, 윤증 편을 들었으나, [[병신처분]] 후, 권상하의 서문 역시 올려졌다. 5년 뒤인 1717년, 갑자기 우의정에 임명되어서 다시 은거하며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직접 비답(批答)을 써 내리고 사관에게 같이 오라고 명했다. 계속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결국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들어와 볼수 있다'라고 예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왕의 노력에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로 숙종을 알현했다. 또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양한 뒤 낙향했고, 좌의정으로 승진까지 되었으나 이번을 끝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