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양숙 (문단 편집) == 생애 == 1948년 2월 2일 [[경상남도]] [[창원시|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동대마을)에서 [[빨치산]]이자 [[비전향 장기수]]였던 아버지 [[권오석(1921)|권오석]][*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이에 노무현은 그 유명한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라는 내용의 연설로 강경하게 대응했고, 이것이 오히려 득이 되어 순조롭게 정치인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참고로 노무현은 장인어른의 빨치산 경력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덕남(朴德南, 1920. ~ 2017.2.24.)[* 박희진(朴熙進)의 딸이다.]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진영대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혜화여자중학교를 졸업, [[계성여자고등학교|훈성여자상업고등학교]](현 [[계성여자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 학력 문제로 정치적 반대파 및 우익 세력들로부터 온갖 비하와 음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저 당시에는 여성이 고등학교까지(중퇴이긴 하지만) 갔다는 것만 해도 지금의 대졸자 급의 취급을 받던 시대였다. 권양숙이 재학하던 1960년대 초반 훈성여자상업고등학교(계성여자고등학교)는 부산 서구 학교 밀집지역에 소재한 중위권 사립학교에 속했다. 정치적 반대파와 우익 세력들이 계성여자고등학교를 훗날의 실추된 이미지를 가져와서 똥통 학교라고 비하하지만,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가 지금의 수준으로 몰락한 것은 1974년 고교평준화로 인해 부산의 고등학교 서열이 완전히 뒤엎어진 이후였다. 1974년 이전에는 명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학교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양숙 결혼.jpg|width=100%]]}}} || || {{{#ffc224 '''권양숙과 노무현의 결혼식 사진'''}}} || 노무현과는 1973년 결혼했으며, 노무현의 [[사법시험]] 준비를 뒷바라지했다. 노무현은 권양숙의 도움을 받고 1975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6년 [[사법연수원]] 시절 꽤 준수한 성적[* 여기서 '꽤 준수한'이라는 말은 노무현 자신이 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법연수원 성적 순서대로 판사가 뽑혀나가고 그 다음으로 검사가 뽑혀나간다. 그래도 당시에는 사법시험 선발 인원 자체가 100명 미만으로 극히 적었기 때문에 사법시험 합격 자체가 [[먼치킨(클리셰)|먼치킨]]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특히 노무현이 합격한 17회 사법시험 합격 인원은 60명으로 다른 해보다도 유난히 적었다. 사법시험 합격자가 300명으로 늘어난 23회 사법시험 (연수원 13기) 이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는 과거 민주화운동 전과등 결격사유가 없는 한 거의 100%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었다. 노무현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보기 위해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와서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도 그 자신을 포함해서 [[부산직할시]] 내 전체 변호사가 3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을 올린 덕에 1977년, 1978년 두 해에 걸쳐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할 수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양숙 젊은시절.jpg|width=100%]]}}} || || {{{#ffc224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 노무현과의 결혼 이후 슬하에 아들 [[노건호]]와 딸 노정연 1남 1녀를 두었다. 1997년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현대하이츠빌라에서 거주했으며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03년 2월 25일부터 2008년 2월 24일까지 [[대통령 배우자]] 신분으로 [[청와대]]에서 생활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마지막 노무현 부부 사진.jpg|width=100%]]}}} || || {{{#ffc224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br]권양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 || 2008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함께 봉하마을로 귀향해 거주하며 전원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권양숙 본인에게서 비롯된 [[박연차 게이트]]에 남편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연루되었고 당시 [[이명박]]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주도 하에 검찰 조사를 받던 남편 노무현이 조사 도중 끝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권양숙은 병원에서 두부외상으로 사망한 남편 노무현의 주검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양숙 김대중.jpg|width=100%]]}}} || || {{{#ffc224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의[br]권양숙과 김대중 전 대통령'''}}} ||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서 부인 [[이희호]]와 함께 휠체어를 끌고 자리에 참석한 말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양숙의 손을 붙잡고 위로를 했다. 당시 권양숙 앞에서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도 대단히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2009년]] [[9월 1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과 봉하재단이 분리되면서, 봉하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직하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며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의 싱크탱크 역할도 겸하는 노무현재단과 달리 봉하재단은 순수히 봉하마을 시설관리와 농작물 사업 등 민간 차원의 사업에 집중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건희와 권양숙 사진.jpg|width=100%]]}}} || || {{{#ffc224 '''권양숙과 김건희'''}}} || 2022년,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취임 직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배우자가 된 [[김건희]]가 대선배 격인 권양숙을 예방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자신을 만나러 온 김건희와 90분 가까이 환담을 나눴고 함께 봉하마을에 자리한 노묘역(노무현대통령 묘역)을 방문해 참배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