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영세 (문단 편집) === 제16-18대 국회 === [[김민석(정치인)|김민석]] 의원이 제3회 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2002년 8월 8일 재보궐선거에서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발탁되어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야출신 명망가 [[장기표]]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며 국회에 등원한다. 당시 주변에서는 권영세 전 변호사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등을 거친 측면에서 이회창 전 총재와 이미지가 접맥된다는 시선이 있었다.[* 이후 권영세는 내리 3선을 하지만, 장기표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다시 독자행보를 펼친다. 두 사람은 18년이 지나서 같은 당에서 재회하지만 둘 다 지역구를 옮겼을 때 권영세는 당선되어 다시 원내로 복귀하지만 장기표는 또 다시 낙선을 한다. 물론 계속해서 보수정당에서 활동한 권영세와 달리 장기표는 좌우 할 것 없이 신당을 만들었다 부쉈다를 반복하면서 정치낭인으로서의 행보를 펼쳤지만.] 초선 시절 "21세기는 투쟁적 민주주의를 이끌던 사람보다는 '민주주의를 생활화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면서 '젊은 전문가 대 과거의 민주투사' 구도로 이끌겠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권영세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 총선]]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뚫고 그것도 수도권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권영세 입장에서는 운이 잘 따라줬는데 [[김종구(정치인)|김종구]] [[열린우리당]] 후보와 박금자 민주당 후보가 따로 출마하는 바람에 범 여권 후보들의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 이후 야당의원으로서 정부, 여당의 [[저격수]]로 활약하였는데, 이전의 저격수와는 달리 사실관계에 입각한 공격으로 '신형 저격수'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활약을 하게 된다.[* 국정원 X파일, 오일게이트도 권 의원의 작품이라고 한다.] [[2006년]] 지방선거 서울시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지방선거 대승을 견인하였으며, 한나라당 소장 중도개혁파 모임인 '미래모임'의 대표주자로서 2006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임태희, 남경필 등과 경선 끝에 승리 -> 소장파 대표로 출마하였으나 지도부 입성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강재섭]] 대표 체제에서 임명직 최고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2007년]] [[이명박]]과 [[박근혜]] 후보 간의 치열한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맹형규]], [[임태희]], [[권영진]] 등과 "중립모임"을 창설하여 당이 선거과정에서 소위 [[친이]], [[친박]]간 과열경쟁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는 활동을 하였다.[* 경선 직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이 정치적 장래를 보장하겠다며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상당수가 범친이계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권영세는 끝까지 중도성향을 유지하다가 이를 계기로 박근혜의 호감을 샀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합민주당 이경숙 후보를 꺾고 3선의 고지를 밟았고, 2009년 치뤄진 한나라당 서울시당 위원장 선거에서 서울의 일부 중도파 위원장들이 시당위원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서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친이계 의원, 위원장들이 [[전여옥]] 전 의원을 내세워 경선을 요구하여 경선을 치룬다. 접전이 펼쳐질 것이란 당초 예상을 깨고 낙승. 16, 17, 1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나라당 최고위원, 사무총장,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외교통일위원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학기술통신위원회]], [[정무위원회]] 등 다양한 상임위에서 활동하였다.[* 다만 2년마다 새로운 상임위를 가는 것은 국회의원 이력상 놀라운 것은 아니다.] 끝으로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계층들이나 사회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는 집단들에 대해 초점을 맞춰 입법 활동을 해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기획재정위원회]]로 상임위를 옮겨 정책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2011년 12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당의 쇄신과 2012년 공천을 주도하였다. 당시 야권연대가 우세하리라는 언론의 예상을 깨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2012년 총선]] 승리를 견인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소위 '사무총장의 저주'를 넘지 못하고 [[신경민]] 후보에게 낙선하여 4선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여의동에서 더블스코어에 가깝게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승부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