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응수 (문단 편집) == 생애 == 1546년([[명종(조선)|명종]] 1) 11월 21일 경상도 신녕현 대량면 상추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웃가래실마을)에서 아버지 권덕신(權德臣, 1518 ~ 1578. 11. 29)과 어머니 [[성주 이씨]](1518 ~ 1578. 12. 24) 이운겸(李云謙)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4년([[선조(조선)|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105위로 급제[[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84_000927|#]],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 자리를 거쳐 훈련원 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의 용만관[* 龍灣館, 중국의 사신이 묵던 숙소]를 지켰다. 이후 [[경상좌수영]]을 지휘하던 [[박홍]]의 밑에서 일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홍]]의 [[삽질]]로 경상 좌수영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별 수 없이, 권응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의병을 규합, 5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6일에는 한천에서 의병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다. 7월에는 화공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일본군 제5군이[* 혹은 2군 [[가토 기요마사]]가 남기고 간 군사들이라고도 한다.] 점령하였던 [[영천 전투|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권응수는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우후(虞侯)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경주 전투]] (1차)를 벌여 경주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공을 쌓아 경상도 병마 좌별장 등의 자리에 올랐다. 1차 및 2차 [[울산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전쟁 후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08년([[선조(조선)|선조]] 41) 7월 13일 한성부에서 별세하였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