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준(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1895년 5월 2일 안동부 함창군 북면 척동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척동리)에서 아버지 권석주(權錫周, 1844 ~ 1899. 4. 1)[* 초명 권홍일(權弘鎰).]와 어머니 [[함창 김씨]](1852 ~ 1927. 10. 23)[* 김리(金履)의 딸이다.]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서울공업고등학교|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권준은 광복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퉁지대학]] 공과에서 수학했다. 그 무렵 [[3.1 운동]]이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권준도 만세운동보단 무력투쟁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해 같은 해 11월 9일 [[김원봉]]·[[윤세주]] 등과 [[의열단]]을 결성한다. 거기서 그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의거·[[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와 [[김지섭]]의 도쿄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등 의거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책임을 주로 도맡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검거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4년에는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나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치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보고 독립운동 노선도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1926년 3월 8일 [[쑨원]]의 추천장을 받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전공, [[장흥(독립운동가)|장흥]]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약속했다.[* 이 둘은 의열단, 조선의용대와 연관되었으나 광복군 창설 후에는 좌익계열과 거리를 두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성으로 복무하였다.] 졸업한 뒤에는 교관으로 배속되어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에는 [[난징]]에서 [[장제스]]의 지원을 받은 의열단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35년까지 125명의 졸업생을 냈으며 권준은 거기서도 교관을 맡았다. 1933년, 권준은 [[국민혁명군]] 장교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도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려고 했으며,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우한시|우한]]방위전에도 참가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 내무부 차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우한지구 교포선무단장 및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을 잠시 맡다가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군 창설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1반에 입교, 약 3주 간의 훈련을 수료하고 이듬해 1월 1일에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당시 대령으로 함께 임관한 [[김석원]]·[[오광선]]·[[이준식(군인)|이준식]], 준장으로 임관한 [[김홍일(군인)|김홍일]], 중령으로 임관한 [[안춘생]], 소령으로 임관한 [[전성호]] 등의 동기가 있었다.][[https://news.joins.com/article/1693943|#]] 임관한 후에는 제106여단장, 초대 [[수도방위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 103사단장, 북부지구경비사령관, 서부지구경비사령관, [[육군훈련소]]장, 초대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 초대 [[제50보병사단]]장 등을 지냈다. 6.25 전쟁 중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56년 김석원, 오광선 등 군 원로들과 함께 전역하였으며, 전역과 함께 소장에 진급했다. 한편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거나 문화재 재정비하는데도 힘썼는데 1954년 [[민긍호]] 의병장의 묘를 이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며, 1958년에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안동 권씨]] 시조 [[권행]]의 묘인 태사묘를 재정비했는데, 이 사실은 족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1959년 10월 27일 별세하였으며,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