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진규 (문단 편집) == 귀국 이전 == 1922년 [[함흥시|함흥]]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함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작은 누이 경숙에 따르면 오빠 진규는 명랑하고 장난기가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기 늑막염으로 1년을 쉬었고 함흥에서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는 바람에 다시 1년을 쉬었다.1938년 4월 [[춘천고등학교|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중,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1943년 3월 졸업하였다. 1943년 봄, 권진규는 친형 진원을 따라 일본 도쿄로 가 사설미술학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징용되었다. 히타치 다치카와 공장에서 거친 노역살이를 하다가 용케 탈출하여 바다 건너 고향인 함흥에 돌아왔다. 부친 권정주는 아들 진규를 자신 소유의 인근 과수원에 은신케 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렇게 2년 여 후에 비로소 가족들과 재화하게 되는데 누이 경숙은 오빠 진규의 성격이 그 사이 확 바뀌어 과묵하고 침울해졌다고 회상했다. 1946년-1947년에는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다니는 누이 영숙, 이화여대에 다니는 경숙과 함께 서울 성북동에서 살았다. 마침 인근에 이쾌대(1913-1965)가 세운 성북회화연구소가 있어 권진규는 그곳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이쾌대의 지도 하에 그림 공부를 하였다. 김창렬, 심죽자, 전뢰진 등이 그 때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었다. 권진규는 일본 유학을 희망하였으나 부친이 아들의 미술 공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던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가 다가왔다. 조각가 [[윤효중]](1917~1967)이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의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조수로서 약 6개월간 그를 도왔다. 속리산 법주사 대불 조성은 조각가 [[김복진]](1901~1940)이 시작하였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이 기간에 권진규는 김복진이 남기고 간 다수의 작품을 윤효중과 함께 충무로 수장고에서 친견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최열, 2011; 39쪽). 아마도 이 때 권진규는 향후 조각가의 길을 꿈꾸게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일본에서 의사가 된 형 진원이 폐결핵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에 아버지 권정주는 가서 형을 간병하라고 동생 진규를 일본에 보냈다. 당시 한국과 일본 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던바, 밀항해 들어갔다. 1949년 봄, 형 진원은 동생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권진규는 귀국하지 않았다. 그 때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쾌대]]의 소개 또는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27세였다. 당시 도쿄에는 큰 미술학교가 두 곳 있었다. 하나는 사학인 무사시노 미술학교이고 관학으로는 도쿄 미술학교가 있었다. 무사시노미술학교는 종전엔 데이코쿠미술학교로 불리었으며 1962년에 [[무사시노미술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권진규는 1953년 3월 무사시노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로댕 Rodin - 부르델 Bourdelle의 맥을 이어받은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Takashi Shimizu, 1897~1981)를 사사하였다. 1952년 37회 이과전( 二科展)에서 입상하였고 1953년 38회 이과전( 二科展)에서 특대(特待)상을 받았다. 출품작은 <백주몽白晝夢>,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 <기사騎士>로 모두 석조였다. 당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위치한 기치조지(吉祥寺) 역 근처에는 묘석상이 다수 있었다. 권진규는 묘석상의 석공들로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시미즈 교수는 권진규가 돌로 조각하는 것을 언찮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시미즈 다카시는 주로 브론즈 작업을 하였다. <백주몽白晝夢>, 즉 "한낮의 꿈"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았는데 몸체는 사람이나 머리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는 직방형의 묘석을 최소로 깍아 말의 머리를 단순하게 형상화한 돌 조각이다. <기사騎士>에는 말과 혼연일체가 된 기수가 형상화되었다. 이처럼 권진규의 미술대학 시절 작품엔 말(馬)이 많고 이후로도 말이 평생의 테마로 자주 활용되었다. 1951년, 권진규는 같은 학교 서양화과의 오기노 도모(荻野トモ, 1931~2014)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였다. 도모는 진규보다 아홉살 연하의 짧은 머리 숙녀였다. 도모는 인상이 부드러웠지만 생각에 심지가 있었고 독립적 생활력이 있었다. 도모는 미술대학 졸업 후 마네킹 제작, 재봉과 공예 등으로 경제적 수입을 확보하여 평생 자기 그림을 그렸다. 권진규가 1951년 제작한 <도모>는 권진규의 현존하는 작품 중 최초의 것으로 권진규가 1959년 귀국하면서 도모에 맡겨졌다. <도모>는 도모가 2014년 이 세상과 작별하기까지 도모와 함께 하였다. 도모가 간 뒤 진규의 누이 경숙이 <도모>를 확보하여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진규와 도모가 함께 있게 되었다. 미술학교 재학 시기(1949년~1953년), 권진규는 생활이 어려웠다. 1950년 이후 한국전이 발발하고나서는 본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없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진규의 석조 여러점을 사주었다. 다나카의 사후, 누이 경숙이 수년 간 수소문 끝에 다나카 이사장의 딸을 만났고 그의 자택 정원에 놓여 있던 이들 작품들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1953년,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학교를 졸업하지만 연구생 신분으로 학교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진규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자상한 실력파 형 또는 선배였다. 진규는 학교 인근의 싸구려 하숙에서 도모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동거를 함으로써 그들은 생애 최고의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955년, 진규는 도모의 니카타 친가에 체류하면서 <보살입상> 등 나무조각을 하였다. 산책 길에 기와 공장이 있어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이를 계기로 진규는 테라코타를 하게 되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빈터에 가마를 만들어 흙을 구웠다. 진규는 영화제작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진규와 도모는 한동안 마네킹 공방에서 같이 일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음에도 진규와 도모는 고급 카페를 출입하며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1959년, 진규는 귀국을 결심하였다. 홀로 된 노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적 동기가 더 컸다. 조각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지 10년이 넘었지 않은가?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시미즈 다카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기류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 그런데 한일 양국관계가 도모와 같이 귀국할 사정이 아니었다. "일단 혼자 귀국하여 자리를 잡고 양국 관계가 호전되면 도모를 데리러 다시 오리라." 8월 네리마(練馬)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고, 9월 하네다에서 홀로 비행기를 탔다. 진규의 귀국 전날, 도모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일어나 재봉틀에 앉았다. 진규의 작은 누이 경숙의 네 아이를 위해 옷 네 벌을 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