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진규 (문단 편집) == 사후의 "권진규" == 사후 언론보도는 짤막하게 나왔으며, 그의 시신은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묻힌 1973년 5월을 기점으로 망우리 묘지의 안장이 금지되어 사실상 그가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진규의 자결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그를 다시 보았다. 하루 아침에 권진규는 "비운의 천재"로 바뀌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변덕은 호들갑에 불과하다. 권진규는 그의 세대에서 특별히 운이 나쁘지 않았다. 운이 좋아 도모와 연이 닿았고 운이 좋아 착한 누이 경숙이 있었으며 운이 좋아 진규를 어떻게든 미술계 중앙에 넣고자했던 9촌 조카 옥연이 있었다. 평론가 유준상, 박용숙 등은 진작 그를 알아봐주었고, 박혜일, 이규호, 안동림, 김문호 등 우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천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나라는 집단적으로 '천재' 컴플렉스에 걸려있다). 그는 오히려 바보에 가깝다. 대부분의 이웃이 거들떠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진규는 혼신의 힘으로 우직하게 자기류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사후 15주기인 1988년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엔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에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2009년은 모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개교 8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무사시노가 배출한 가장 자랑스런 동문으로 권진규가 뽑혀, 모교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그리고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2004년,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가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101호 ~ 제200호|국가등록문화재 제134호]]로 등록되었다. 2006년, 누이 권경숙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틀리에와 살림채를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http://www.ntculture.or.kr/]]에 기증하였다. 아틀리에는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영구히 보존하는 시민문화유산 제3호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http://www.ntculture.or.kr/culturalHeritage/3]]. 권진규 작품을 모아온 미술 애호가 박문덕 하이트문화재단 이사장과 김현식 대일광업 회장은 권진규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누이 권경숙과 권진규기념사업회가 2021년 유작 대부분과 일본에서 회수한 권진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2022년 권진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렸다(3.24~5.22)[* 당시 전시품 중에는 [[방탄소년단]]의 [[RM]]이 소장하고 잇던 '말'도 있었다.]. 또한 누이 권경숙의 손자 [[허준이]]가 [[필즈상]]을 수상하는 가문의 경사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