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토중래 (문단 편집) == 유래 == 이 고사성어는 중국 [[당나라]] 후기의 시인 [[두목(당나라)|두목]]의 시 '제오강정(題 烏江亭, 오강 [[정자(건축물)|정자]]에서 짓다)'에서 유래[했다. 오강은 [[항우]]가 [[고제(전한)|유방]]에게 패하여 최후를 맞이한 곳인데, 당초 두 사람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나누기로 했었으나 유방은 항우를 살려두면 후환이 되니 그를 습격해서 죽여야 한다는 [[장량(전한)|장량]]과 [[진평]]의 진언에 따라 화의를 깨고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해 포위했다.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배를 끌고 온 오강의 정장이 '''[[강동#s-2.6|강동]]([[강남(중국)|강남]])으로 돌아가서 재기하시죠.'''라고 권했으나 항우는 "강동에서 함께 일어난 8천 장정들이 모두 죽었는데[* 당시 26명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낯으로 강동으로 돌아가겠나?"라면서 유방의 포위망에 뛰어들어 최후의 결전을 치르다 목을 베어 자결한다. 그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당나라 후기의 [[시인(문학)|시인]] [[두목(당나라)|두목]]이 오강의 객사에 머무르다가 항우와 오강정장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지은 시가 바로 '제오강정'이다. >勝敗兵家事不期(승패병가사불기):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이라 예측하기 어려우며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으리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항우가 강동에서 재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강동 지역은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었고 인구도 많지 않았으며,[* 당장 일화에서만 해도 수십만으로 언급한다. 객관적으로 한의 체급과 비교하면 10배는 되는 차이다.] 이미 중원 전체를 장악한 유방을 상대하기엔 격차가 너무 컸다. 더 장기적으로 강동을 개발하며 국력을 축적하려 해도 유방의 한나라가 이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남쪽으로 눈을 돌릴려고 해도, 이민족들이 이미 터를 잡고 살았던데다가 그 당시에 존재했던 나라인 민월과 동구는 유방 편이었기 때문에 항우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마냥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한나라의 국력 또한 한계에 가까웠던 상황이었고, 이때 잃은 손실을 온전히 복구하기 위해서 '''약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결정적으로 거기서 더 국력을 손실했으면 흉노에게 멸망당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항우가 만약 강동으로 도주해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항우의 천하가 재림하긴 어려웠을지라도 한과 초가 공멸했을 확률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위만에게 배신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긴 [[준왕]]이 익산을 중심으로 [[건마국]]을 건국하여 한동안 [[삼한]] 전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장강이남 지방에서도 동맹세력이 있던 유방과 달리 위만은 한반도 남부에 동맹관계에 있던 나라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경기-전남에 이르는 지역은 한반도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손꼽히는 곡창 지대이기도 했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