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천상혼 (문단 편집) == 귀천상혼으로 유명한 인물 == * [[에드워드 8세]] 영국 [[윈저 왕조]]의 전 국왕. 현대의 귀천상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스스로 영국의 왕위에서 퇴위했다. 다만 해당 문서에 나오듯이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할 정도로 영국 왕실 및 내각에서 결혼을 강하게 반대한 이유는 심프슨 부인의 신분 문제보다는 사생활 문제가 더 컸다. *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로서 일국의 왕녀와의 혼인이 당연시 됐으나, 놀랍게도 프란츠가 결혼한 여인은 일개 백작 딸에 불과한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였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카를 루트비히]]([[프란츠 2세]]의 남동생) 대공의 후손인 테셴 공작의 궁전에 자주 방문하자 당연히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가 테셴 공작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상은 테셴 공작의 딸의 시녀였던 조피를 보기 위해 테셴 공작의 궁전에 방문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프란츠와 조피의 2남 1녀도 황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귀족 작위만 물려받았다. * [[카롤 2세]] [[루마니아]]의 국왕. 결혼 전부터 사생활이 워낙 문란하여 지지 람브리노(1898~1953)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카롤 람브리노(1920~2006)이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이후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와 결혼해 적자인 [[미하이 1세]]를 낳았지만, [[마그다 루페스쿠]]라는 여성과 대놓고 동거하며 불륜을 저지르다가 이혼당한다. 이런 추태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와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왕위계승에서 배제당해 페르디난드가 승하하자 아들 [[미하이 1세]]가 대신 즉위한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답이 없다|권모술수로 아들을 쫒아낸 뒤 본인이 다시 즉위했다]]. 결국 왕위에서 쫒겨나서 정착한 망명지에서 마그다와 결혼까지 한다. * 루트비히 빌헬름 [[바이에른 왕국]]의 공작.[*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작위.]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자로 방계라 해도 엄연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극장 여배우 헨리에트 멘델과 딸을 낳고 둘째를 임신하자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1859년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권과 공작위 계승권까지 포기했다.[* 의사가 되려던 남동생 카를 테오도르가 대신 공작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딸이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 여동생이 그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로 그녀는 오빠의 사생아 딸을 귀여워했는데, 이 조카딸이 바로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와 마리 폰 베체라의 밀회를 주선하다가 그들의 자살로 궁정에서 쫓겨난 라리쉬 백작부인. 이 일로 엘리자베트는 조카와 그 가족들까지 손절하고, 영원히 [[이름조차 불러선 안될 자]]로 선언했다. *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루트비히 2세(헤센)|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의 4남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헤센의 마리]]의 오빠이기도 하다. 여동생이 시집간 [[러시아 제국]]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마리의 시녀이자 백작의 딸 [[율리아 하우케]][* 유럽의 [[시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율리아 또한 [[폴란드 입헌왕국]]의 전쟁부 차관이었던 한스 모리츠 폰 하우케 백작의 딸로 엄연히 상류층 귀족이었다. 하우케 백작은 독일계 폴란드인으로 평민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를 눈여겨 본 [[니콜라이 1세]]에 의해, [[폴란드 입헌왕국]] 전쟁부 차관에 발탁되고 백작 작위까지 수여받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자였다. 그러나 하우케 백작은 1830년에 폴란드 총독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니콜라이 1세]]의 형)을 노린 반란이 일어났을 때 살해당했고, 그 아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율리아를 포함해 고아가 된 하우케 백작의 자식들을 [[니콜라이 1세]]가 거두어 그의 며느리인 헤센의 마리의 시녀가 된 것이다.]에게 반해 그녀와 야반도주하여 결혼했다. 그래도 율리아는 알렉산더의 형인 [[루트비히 3세(헤센)|헤센 대공 루트비히 3세]]에게 바텐베르크 공비 작위를 받아, 바텐베르크 가문을 창시했고 4남 1녀의 자식들을 낳으며 평생 알렉산더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살았다. 알렉산더와 율리아의 장남이 바로 [[필립 마운트배튼|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이며, 3남이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의 남편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다. 특히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고, 하인리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하는 등, 아들들이 하나같이 혼사를 잘 맺은 걸로 유명하다.[* 비단 루트비히와 하인리히뿐만 아니라 막내아들인 프란츠 요제프 공자도 [[니콜라 1세]]의 6녀인 몬테네그로의 안나 공주와 결혼했다.] 이윽고 알렉산더의 손녀 대에서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스웨덴의 왕비]], [[빅토리아 유지니|스페인의 왕비]]까지 배출하는 등, 바텐베르크 가문은[* 이후 마운트배튼 가문으로 개명한다.] 매우 번성한다. * 쿠를란트 공작 카를 귀천상혼한 인물 중 뒷이야기가 매우 극적인 일화의 주인공.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3남으로, [[카를로스 4세]]와 [[루이 16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엄연한 왕공가의 자제였지만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으로 잠시 재위하던 기간인 1760년에 폴란드의 백작 출신인 프란치슈카 크라신스카와 비밀결혼을 했다.[* 명백한 귀천상혼이었던데다, 당시의 복잡한 정치사정 탓에 둘의 결혼 사실은 카를이 쿠를란트 공작위를 상실한 지 1년 후인 1764년에야 공표되었다.] 슬하에 딸 1명을 두었는데, 이후 이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가]]의 방계 가문인 카리냐노 분가 출신의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고, 그 중 아들인 [[카를로 알베르토]]는 뒷날 사보이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된 후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이후에 성립된 신생 이탈리아 왕가의 직계조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