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단스크 (문단 편집) === 폴란드의 지배 (1466 ~ 1793) ===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 [[1386년]]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는 크레바 법령(Krėva Act)을 통해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혼인 후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고 후일 브와디스와프 2세라고 불리게 된다)와 혼인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공동 통치하였다(다만 리투아니아 통치는 명목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대공 섭정이 통치했다). [[1399년]] 야드비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최초의 왕으로서 폴란드를 단독 통치한다. 한편, 요가일라 왕이 폴란드로 떠난 리투아니아에서는 스키르가일라(Skirgaila)가 1386~1392년까지 대공 섭정이 되어 리투아니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1392년]]부터 [[1430년]]까지 대 비타우타스가 리투아니아의 새로운 대공이 되어 리투아니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이 두 명의 통치자 브와디스와프 2세(요가일라)와 대 비타우타스에 의해 지휘된다. 따라서 아직 두 나라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한 명의 통치자 아래에서 실질적이고 완전한 [[동군연합]]을 이룬 상태는 아니었다. 이런 형태의 동군연합은 1444년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한 뒤 3년의 공위 기간을 거쳐 새로 즉위한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 대에 이루어진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결성으로 실질적(연방이 두 나라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훨씬 후인 [[1791년]]에야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하나의 나라가 되는 건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이루어진다.]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세가 크게 꺾였고 기사단은 폴란드가 요구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기 위해 휘하 도시들의 세금을 크게 인상했다. 기사단은 [[1431년]] 폴란드를 침공해 또다시 도시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는데 이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세금을 올리자 도시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참다못한 그단스크(단치히), 엘블롱크(Elbląg, 엘빙), [[토룬]](Toruń, 토른)의 세 한자동맹 소속 도시들은 주변의 소도시들과 함께 [[1440년]] 프러시아 연합을 결성하고, [[1454년]]엔 독일 기사단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폴란드 왕에게 출병하라고 탄원하며 함께 참전하기로 했고 이에 응하여 카지미에시 4세는 13년의 전쟁 끝에 독일 기사단국을 종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단치히는 폴란드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러시아 연합의 도시들은 폴란드를 따라 참전했는데 부유한 도시였던 단치히는 주로 동맹국에 자금을 공급해주거나 함대를 지원했다. 당시 기사단의 수도성이던 마리엔부르크 성(말보르크 성)은 [[중부 유럽]] 최강의 요새였는데 기사단의 군대가 모두 야전에 나가있어 보헤미아의 용병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날수록 기사단의 자금 상황이 악화되자 기사단은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없었다. 단치히 시는 기금을 조성해 폴란드에 바쳤고 [[1457년]] 폴란드는 이 돈을 주며 보헤미아 용병들에게 성을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마리엔부르크는 빈 성이 되어버렸고 카지미에시 4세는 피 한방울 안들이고 적국의 수도이자 최강의 요새를 점령했다. [[1463년]] 비스툴라 석호의 해전에서 단치히의 함대는 30척에 이르는 연합군 함대의 대부분을 구성하며 44척의 기사단 [[해군]]을 전멸시키고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군이 없어진 기사단은 더이상 수로, 해로를 이용한 무역 행위를 할 수 없어 자금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466년]] 2차 토룬 평화협정을 통해 폴란드는 그단스크 포모제(Pomorze Gdańskie)[* 원래 그단스크는 [[포메른]]의 일부로 '포모제 그단스키에(Pomorze Gdańskie)'라고 하지만, 폴란드가 이때 획득한 그단스크와 그 주변을 서부 프로이센과 묶어서 '왕령 프루시'라고 하는 바람에 그단스크는 포메른과 프로이센 양쪽에 모두 속하게 된다. 훗날 프로이센 왕국은 이 지역에 [[서프로이센]] 주를 설치했다. 현재 이 지역은 폴란드 포모제 주에 속한다.] 대부분을 병합하고 기사단국을 폴란드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 왕국]]에 넘어갈 때까지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영토로 남게 된다.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를 도와준 도시들에게 많은 특혜를 주며 보답했는데 당연히 그단스크가 받은 특혜가 가장 컸다. [[16세기]] 그단스크는 폴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1502년]]엔 지금도 그단스크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수놓는 거대한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다. [[1520년]]에는 [[마르틴 루터]] 번역의 [[성서]]가 인쇄되었으며[* 곧 루터교도의 반란이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서적들도 인쇄되며 선진문화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한번 반란이 일어났는데, [[1570년]] 지그문트 2세가 도시의 특권을 살짝 철회하자 열받은 도시민들이 1577년 후임 왕인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hory)[* 헝가리의 귀족으로 세임(Sejm)에 의해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헝가리어]] 이름은 바토리 이슈트반(Báthory István). 소모적인 경기병 부대였던 폴란드 후사르를 [[윙드 후사르|전설적인 중무장 돌격 기병대]]로 개혁한 것으로 이름높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실군은 단치히 근처 루비에슈프(Lubiszewo Tczewskie)에서 반란군을 대파하는데엔 성공했지만, [[동유럽]]의 손꼽히는 [[요새]]였던 단치히를 쉽게 점령할 수 없었고 반란군도 왕의 군대를 몰아내지 못하자 결국 도시는 20만 [[즈워티]]라는 거금의 배상금과 함께 왕의 도시 지배를 더 확실히 인정하고 왕도 도시의 특권을 돌려주며 반란이 진정되었다. 그단스크는 연방[*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공국은 1569년 루블린 연합을 통해 100년 넘게 지속되던 동군연합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한 나라로 통합했다.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서술할 때까지 폴란드를 연방이라 기술한다.]뿐 아니라 한자동맹 내에서도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도시 중 하나였는데, 뤼벡과 더불어 발트해 연안 최대의 무역도시로서 [[1554년]]부터 한자동맹이 소멸할 때까지 동맹의 리보니아-프로이센-스웨덴 지구[* 다른 세 지구는 벤덴-포메른 지구(수도 [[뤼베크]]), 작센-튀링겐-브란덴부르크 지구(수도 브라운슈바이크), 라인-베스트팔렌-네덜란드 지구(수도 [[쾰른]]). [[1356년]] 세개의 지구로 나눴던 것을 기존의 지구들이 너무 넓어 의사결정과 협력에 방해가 되자 [[1556년]] 4개로 개편한 것이다.]의 수도였다. 또한 [[1669년]] 한자동맹의 마지막 회의때까지 한번도 빼놓지 않고 동맹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 시기 그단스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사실상 유일한 항구로서 폴란드의 주요 교역품인 [[곡물]]이 그단스크를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을 비롯해 많은 유럽 나라들이 이 곡물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그단스크와 교역이 가장 많던 나라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갓 독립하여 [[유럽]] 최대의 무역, 상업국가로 성장중이던 [[네덜란드]]였는데, 네덜란드와는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교류도 잦아서 수많은 네덜란드 건축가들이 그단스크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 시기 그단스크의 거리는 네덜란드 건축가들에 의해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탈바꿈했고, 현재 복원된 그단스크 구시가의 원형은 이 때의 거리이다. 그단스크는 [[국제도시]]의 면모도 보여서 폴란드인, 유대계 폴란드인, [[라트비아어]]를 쓰는 쿠로니아인, [[네덜란드인]], 남부 네덜란드인(현재 [[벨기에]], [[룩셈부르크]]인), 포메른 방언을 쓰는 독일인 등 수많은 민족이 어울려 살고 여러 언어가 쓰이는 도시였다. 이 무렵 연방은 1581년 체결된 드로히친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 [[최대도시]]이자 그단스크에 버금가는 항구도시인 [[리가]](Riga)를 손에 넣었지만 리가의 번영은 그단스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긴 [[평화]]와 함께 도시의 번영은 17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도시는 [[17세기]] 중반부터 [[스웨덴]]과의 연이은 전쟁에 휘말리며 발전이 멈춰버렸다. [[1626년]]에서 [[1629년]]까지 '북방의 사자' [[스웨덴 제국|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연방 북부해안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포모제 지역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마을들이 싸우지도 않고 [[스웨덴군]]에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그단스크는 사실상 이 지역에서 고립된 상황이었음에도 끝까지 연방에 충성하며 스웨덴군을 번번이 격퇴했고 해군이 빈약한 연방에 함대를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자치도시인 만큼 자체적인 군대와 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요새로 방어되었기에 스웨덴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연방은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리가와 [[리보니아]] 상당 부분을 40년이라는 짧은 통치 끝에 스웨덴에 넘겨줘야 했지만, 스웨덴은 최대의 수확물이어야 했을 그단스크를 함락할 수가 없었기에 원정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약 30년 뒤 연방이 [[대홍수(역사)|대홍수]]로 신음하던 시절 스웨덴은 다시 연방을 침공했는데(1655~1660), 연방의 북부 절반이 스웨덴에 점령당하고 [[바르샤바]]까지도 일시적으로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연방에 충성하고 스웨덴군을 격퇴해 연방 북서부에서 혼자 스웨덴에 점령당하지 않은 도시로 남았다. 이렇게 큰 전쟁을 거치는 동안 도시는 자신을 지켜내는데엔 성공했으나 그때마다 [[경제]]는 괴사 지경에 이르렀다. [[1709년]]엔 선페스트가 유행해 도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1733~[[1735년]]까지 벌어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스타니스와프 1세]]를 지지하다 [[1734년]]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는 [[러시아 제국군]]에 의해 결국 도시가 점령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