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단스크 (문단 편집) ===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지배 (1793 ~ 1919) === 연방의 국운이 쇠하고 결국 [[폴란드 분할]]까지 오게 되었을 때, 그단스크는 [[1772년]] [[폴란드 분할|1차 분할]] 당시 연방의 프루시 주가 거의 모조리 프로이센으로 넘어가는 중에도 격렬히 저항하며 연방에 남길 원했다. 도시는 연방에 남았지만 본토와의 연결은 단절되었고, 결국 [[1793년]] 프로이센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도시에 살던 [[폴란드인]] 대부분이 도시를 떠나 이주했으며, [[1797년]]에는 학생들 중심으로 프로이센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신속히 진압당했다. 폴란드인의 이주로 말미암아 도시는 빠르게 독일화되었다. [[나폴레옹 전쟁|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제4차 대 프랑스 동맹을 쳐부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방어군을 물리치고 [[1806년]] 이곳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곧 이곳에 괴뢰정부인 [[단치히 자유시]]를 세웠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몰락하자 단치히는 다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고 1년여에 걸친 [[공성전]] 끝에 다시 함락되어 프로이센의 영토로 돌아갔다. 프로이센 통치기 때는 프로이센의 일부로서 [[관세동맹]]의 회원이 되기도 했고,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설립되었을 땐 대표자를 선출해 보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엔 도시 내 독일인 인구의 증가가 살짝 둔화되고 포메른 지역의 폴란드인이 다시 도시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단치히가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될 무렵에는 이 폴란드인들도 도시 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바우티츠키(Bałtycki)'라는 폴란드인 [[은행]]이 생기고 [[1891년]]엔 '가제타 그단스카(Gazeta Gdańska)'라는 [[폴란드어]] 신문이 발간되었다. [[1907년]]에는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지나친 독일화에 반발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