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역사 (문단 편집) === [[그리스 왕국]] === 그러나 [[독립]]을 [[열강]]들이 거저 시켜준 게 아니었다. 우선 독립에 성공한 지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키]] 지방, [[키클라데스 제도]] 뿐이었으며 많은 [[항구]] 이용권을 넘겨줬고, 독립 이후 강대국들의 임시 신탁 통치로 3년 동안 지배받다가 [[1833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왕자가 겨우 18살 나이에 [[오톤]](Όθων)이란 이름으로 [[바실레프스|왕위]]에 올랐다. 한 국가에 다른 국가 사람이 왕가에 오르는 것은 [[유럽]]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다른 국가가 올린 왕가와 [[그리스인]]들 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은 왕가가 대다수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들에게 [[가톨릭]], [[루터파]] 같은 비정교회 [[교리]]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골수 가톨릭인 오톤과 정교회가 대다수인 그리스인들은 시작부터 [[갈등]]을 빚었고 오톤은 그리스어를 전혀 하지 못해 [[통역]]을 통해 이야길 들어야 했다. 오랜 갈등 끝에 오톤은 정교회 신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양보를 해야했으나, 그 뒤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켜 [[왕당파]]와 [[군주국의 공화주의|공화파]] 세력의 갈등은 오랫동안 [[그리스 왕국|그리스]]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던 오톤은 유달리 '[[동로마]] 고토의 회복([[메갈리 이데아]])'[*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모든 땅이 그리스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 [[민족주의]] 사상]를 표방하며 [[크레타 섬]]과 과거 동로마 영토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크림 전쟁]]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오스만 제국을 치려다가 분노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그리스 여러 곳이 점령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휴전과 함께 양국에 막대한 배상금과 여러 굴욕적인 조건을 들어줘야 했고, 이후에도 국민들과 지속적인 갈등을 겪다가 [[1862년]] 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어 본국인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차기 국왕을 두고 여러 갈등 끝에 이번에는 [[덴마크]] 왕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드 아돌프 게오르크 공이 겨우 17살 나이에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라는 새로운 왕으로 제위하게 된다. 이 또한 영국·프랑스·러시아에 의한 강압적인 조치였기에 그리스는 그냥 [[외국인]] [[왕족]]을 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스에 좋은 영향도 있었는데 요르요스 1세의 즉위 선물로 영국은 오랫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이 점령했던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게 주었다. 요르요스 1세가 친영파인데다 때마침 이오니아 제도에서 그리스와의 통합을 바라는 움직임이 크기도 했다.] 덴마크 출신 [[귀족]] 빌헬름 카를 에핑엔 스포네크(Wilhelm Carl Eppingen Sponneck) 백작이 왕이 어린 탓에 섭정으로 와서 그리스를 지배했으며 이번에는 [[개신교]] 종파 중 하나인 [[루터교회]] 골수 신도인 스포네크의 강압 정책으로 정교회와 또다른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요르요스 1세가 결혼하면서 후계자인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디노스 1세]]를 얻고 스포네크를 추방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우선 요르요스 1세는 정교회를 믿었으며 입헌 정책으로 그리스계의 입지를 많이 생각해주는 정책을 취하여 비로소 사람들의 믿음을 얻게된다. [[1897년]] 당시 오스만 제국 지배에 있던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계 크레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곧이어 [[그리스-오스만 전쟁|봉기군을 지원하는 그리스와 봉기를 진압하는 오스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의 환자]]라고는 하지만 그리스보다 훨씬 큰 덩칫값은 하고 있었던 오스만에게 그리스는 패배했고 그리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오스만 제국에 물어주며 일부 [[국경]]을 오스만에게 유리하게 수정하여야 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지휘관이던 티몰레온 바소스(Τιμολέων Βάσσος, 1836~1929) [[장군]]은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군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남은 삶을 지내야 했다. 열강들은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리스를 비난하고 이 패배로 오스만 제국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그리스에 주둔하며 주둔비용을 그리스에 전가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의 원인이었던 크레타는 열강이 크레타에서 오스만군을 철수시키고 명목상 오스만 지배 아래의 [[자치국가]]인 [[크레타 자치국]][* 자치국이라고는 하는데 국가 수반은 요르요스 1세의 차남인 안드레아스 왕자이고 총리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열렬한 에노시스 지지자라 사실상 설립부터 그리스의 [[괴뢰국]]이었다.]을 세우면서 그리스의 외교적 승리로 끝이 났다. 요르요스 1세 치세에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 [[불가리아 공국|불가리아]]가 독립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배권을 두고 그리스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오스만이 각자 자국 편입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단체를 동원해 마케도니아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끝내 오스만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세르비아 왕국(근대)|세르비아]],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2번의 [[발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제1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왕국|몬테네그로]] 연합군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쟁을 벌여 연합군이 이겼다. 그러나 영토 보상 등의 여러 문제로 불만을 가진 불가리아가 반발해 갈등을 빚다가 다시 전쟁을 벌였다.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적대했던 오스만 제국까지 이들과 연합해 1913년 6월, 제2차 발칸 전쟁을 벌여 불가리아가 이들에게 많은 영토를 잃고 항복해야 했다. 그리스는 [[테살로니키]]를 포함한 남부 마케도니아, [[이피로스]], [[에게 해]] 제도[* [[도데카니사 제도]] 제외. 여기는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에게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넘어갔다.]]] 등 그리스계가 거주하는 유럽의 영토 중 대부분을 확보하였다. 그리스는 원래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인구가 많지는 않았다가 이 시기에 상당한 인구를 확보해 1913년에는 5,400,000명으로 늘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