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역사 (문단 편집) === [[1차 대전]] 및 [[튀르키예 독립전쟁|튀르키예와의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바실레프스|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가 친독 정책을 취하다가 [[협상국]]에 가담할 것을 주장하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그리스 총리|총리]]와 갈등을 빚어 나라가 아예 [[왕당파]]와 [[북그리스 임시정부|베니젤로스파]]로 분열되는 국론 분열(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이 일어났고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던 협상국의 강압으로 콘스탄디노스가 퇴위하여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해 협상국 편에서 참전했다. [[동맹국]] 편이었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콘스탄디누폴리]]를 제외한 동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의 [[스미르나]]([[이즈미르]]) 지역을 빼앗았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과 손잡은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로부터도 [[서트라키아]]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러나 쫓겨난 왕 콘스탄디노스 1세, 국왕 알렉산드로스, 큰아들 [[요르요스 2세|요르요스]]가 갈등을 빚을 때 1920년 국왕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죽는 일이 벌어졌다. 암살이란 주장으로 정밀한 조사가 이뤄졌으나 조사 결과는 자연스러운 패혈증이었다. 결국 다시 콘스탄디노스 1세가 재위했고 그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의 실현이라는 명목으로 [[1920년]] 스미르나를 넘어서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쳐들어갔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튀르키예군|튀르키예 혁명군]]에게 참패하고 아나톨리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즈미르 지역을 다시 오스만에게 넘겨주고 트라키아도 겨우 12% 남짓을 빼고 불가리아와 오스만에게 모조리 넘겨줘야 했다.여론이 폭발해 국왕은 비난 속에 퇴위하여 큰아들 [[요르요스 2세]]가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 당시 그리스가 [[트라브존]] 등 여러 곳에서 학살[* [[그리스군]]과 그리스계 [[민병대]]는 당시 [[튀르키예인]] 말고도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마구잡이로 학살해버렸다. [[발칸 전쟁]] 이후부터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까지 [[튀르키예]] 전역에서 [[그리스인 대학살|그리스인 75만 명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었는데 애꿎은 아르메니아계까지 무차별로 학살해버리면서 비난을 받았고 나중에 그리스가 패전하자 터키 내 그리스계 민족들은 튀르키예인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로 아르메니아와 갈등을 빚는 [[튀르키예]]가 이것을 언급한다. 다만 그리스인들 입장에서도 오스만인들에게 붙던 아르메니아인들을 곱게 보기는 힘들다.]을 벌이기도 했고 [[1923년]] 체결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조치에 따라 튀르키예 땅에 살던 150만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추방당해서 그리스로 와야 했는데 또 이들이 그리스 안에서 골치가 되어서 그리스인이지만 오랫동안 튀르키예에 살았고 말투와 여러 가지가 낯설었기에 차별을 받았다. 나중에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을 형성하여 [[그리스 내전]]에 끼어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