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역사 (문단 편집) === [[민주화]] 이후: 그리스 제3공화국 === [[그리스 군사정권|군사정권]]이 붕괴된 직후 [[그리스군|군부]]는 [[그리스 왕국|왕정]] 시대의 [[그리스 총리|총리]]였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에게 정권을 이양했고, 카라만리스 과도내각은 군사정권에서 이루어진 [[개헌]]을 무효화했다. 이에 따라 군사정권 이전 헌법에 따라 왕정을 유지할지, 아니면 왕정을 폐지하고 [[그리스 공화국|공화국]]으로 이행할지를 묻는 [[왕정복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그러나 [[1946년]]과는 달리 [[그리스인|그리스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왕정에 대한 신뢰를 거둬버렸고, [[바실레프스|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귀국도 허락받지 못한 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7:3으로 왕정 폐지가 다수를 점해 그리스는 공화국이 되었는데,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정복고를 포기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그리스]]로 영구귀국할 수 있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기간에 잠깐 귀국하긴 했다.] [[1974년]] [[민주화]]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카라만리스 총리는 구 국민급진연합 출신 인사들을 결집하여 [[신민주당(그리스)|신민주당]]을 창당하고,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 군사정권 초기인 [[1968년]]에 이미 [[사망]]했다.]가 이끌던 중도연합 출신 인사들은 요르요스 마브로스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중도연합-새로운 힘[* Centre Union-New Forces]을 창당했는데,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중도연합-새로운 힘에 참여하지 않고 선명한 [[사회주의]] [[좌파]] 노선을 내세운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그리스 사회당]])을 창당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또한 [[그리스 내전|내전]] 당시에 불법화되었던 [[그리스 공산당]]이 재합법화되어 다른 [[극좌]] 정당들과 함께 연합좌파[* United Left]라는 [[정당연합]]을 구성하여 참여했는데, 카라만리스가 왕정 시절에 반공 우익 내각을 이끌며 공산당을 탄압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행보였다. 그렇게 치러진 총선에서 카라만리스의 신민주당은 300석 가운데 22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며 집권했고, 중도연합-새로운 힘이 60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으며, 사회당과 연합좌파는 각각 12석과 8석을 얻으며 [[군소정당]]에 머물렀다. 카라만리스의 신민주당 [[내각]]은 [[그리스 의회|의회]] 임기를 1년 남겨둔 [[1977년]]에 [[의회 해산|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과반 의석을 유지하며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기존 의석(220석) 가운데 49석을 상실하여 171석 확보에 그쳤고, 중도연합-새로운 힘을 계승한 제1야당인 민주중도연합[* Union of the Centre. [[1976년]]에 중도연합-새로운 힘이 재창당하며 형성되었다.]이 기존 의석(60석) 가운데 44석을 잃은 반면,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사회당은 기존 의석(12석)보다 무려 81석이나 많은 93석을 확보하며 민주중도연합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약진함으로써 사실상 최대 승자가 되었다. 또한 [[석유 파동]]의 여파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신민주당 내각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나갔고, 결국 1981년 총선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Ανδρέας Παπανδρέου)가 이끄는 사회당이 172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집권에 성공했다. 초기에 [[NATO]] 탈퇴[* [[키프로스 전쟁]] 당시 나토가 [[그리스 군사정권|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개입을 안 해서 당시 그리스에서 나토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와 [[해외 주둔 미군|미군 기지]] 철수, 복지확충 등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1980년대 후반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혼한데다가 크레타 은행 비리로 측근들과 각료들이 구속되면서 인기가 떨어졌고 이와중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재집권을 노리고 선거제도 개편으로 두차례에 걸쳐 추가로 선거를 벌여 1990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과반을 확보해 집권했다. 다시 집권한 신민주당 정권은 민영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지만 인기없는 민영화 정책과 교육정책을 펼친 덕택에 지지율이 떨어져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경제정책은 1993년에 재집권한 사회당 정권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는 했다. 사회당 정권에서는 [[2004 아테네 올림픽|아테네 올림픽]]의 개최를 다시 이끌어내고 [[제3의 길|경제자유화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며 2001년에 [[유로존]]에 가입하는 업적을 세우면서 도합 11년을 집권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비용이 말썽이 되어서 2004년 초에 치러진 총선(아테네 올림픽 개최 이전)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조카]] [[코스타스 카라만리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재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신민주당 정권은 자산가격 상승과 관광산업 호황을 바탕으로 매년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해나갔지만 2007년 산불사태로 [[그리스/경제|그리스 경제]]는 큰 손실을 입었다. 신민당은 2007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간신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호황의 혜택을 받지못하고 저임금 문제[* 700유로 세대가 화두에 올랐을때가 이때의 일이다.]와 고실업 문제[* [[2000년대]] 초중반에 그리스 실업률은 10% 초반 정도의 수준이었고, 청년실업률은 20%를 넘었다.]에 시달렸다. 결국 [[2008년]]에 이르러서는 [[IMF]]로부터 [[그리스 경제 위기|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에 몰렸는데]], 이에 항의하며 일어난 시위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한 소년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그리스 폭동|대규모 시위 및 폭동]]을 벌이면서 신민주당 정권은 궁지에 몰렸고 조기총선이 치러져 사회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이후 신민당 정권 때 재정적자를 대규모로 은폐했다는 게 드러났다. 그리스의 부채규모는 급속하게 불어났고 결국 버티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아들 [[요르요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사회당 내각은 신민주당 내각에 실망한 [[민심]]과 [[요르요스 파판드레우|가문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후광]]에 힘입어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결국 [[2011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치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치러진 [[2012년]] 5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과반 의석을 상실하고 41석만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는데, [[안도니스 사마라스]]의 신민주당이 승리하는 것은 예상 범위 내였지만, [[그렉시트]] 및 [[긴축]] 반대를 [[모토]]로 내세운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가 사회당을 제치고 원내2당으로 약진하는 [[이변]]을 일으켜 그리스는 물론이고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으며, 연정 협상에서 어느 당도 내각을 구성하지 못해서 같은 해 6월에 재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신민주당과 시리자의 양자대결로 치러진 2012년 6월 총선은 신민주당의 승리로 끝났고, 사마라스는 사회당과 민주좌파당을 끌어들여 연립내각을 구성했으나, 3년만에 연정이 붕괴되어 [[2015년]]에 조기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2015년 1월 총선에서는 시리자가 승리하여 치프라스 내각이 출범했는데, 시리자는 [[유럽 연합]]과 긴축을 놓고 갈등을 빚다가,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긴축 수용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해당 투표에 승리하긴 했으나 [[분당(정치)|분당]] 사태가 일어나 같은 해 9월에 조기총선을 실시했다. 2015년 9월 총선에 승리한 치프라스는 유럽 연합을 비롯한 채권단과 협상하여 긴축을 수용하고 그렉시트를 포기했으며, 이후의 시리자는 [[친유럽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여 [[급진]]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중도좌파]] 정당이 되었는데, [[2018년]]에 이르러 IMF 및 EU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경제정책과는 별도로 [[마케도니아 명칭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케도니아 공화국]]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2019년]]에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한다는 타협안을 이끌어내며 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계승자는 오직 그리스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국민들이 치프라스 내각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구제금융이 종료되었음에도 여전히 나아졌다는 체감이 들지 않는 경제 상황도 치프라스 내각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19년 그리스 의회 총선거|2019년 조기총선]]에서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전 총리의 아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시리자를 꺾고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2023년]]에는 [[라리사 열차 충돌 사고]]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2023년 5월 그리스 의회 총선거|두]] [[2023년 6월 그리스 의회 총선거|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연장했다. [각주] [[분류:그리스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