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역사 (문단 편집) == 근세: [[오스만 제국]]의 지배 ==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지배 기간은 대략 450년에 달한다. 기독교도 봉건 영주에게 착취당하던 발칸 지역의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세금을 덜 내게 해 주는 이교도 지배자를 환영하기도 했고, 그리스인들이 제국의 행정과 지방 통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권력를 누리기도 했다.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슬림 오스만 지배자들이 그리스인들을 쓰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교도들이 변변한 예배장소를 찾지 못해 무슬림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고, 오스만 지배자들이 민족 감정을 일으키는 그리스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이슬람]]을 국교로 삼고 장려했던 오스만 제국도 이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지는 않고 원래 믿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오스만은 종교에 따라 제국의 사람들을 분류한 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밀레트(Millet)라는 공동체로 묶어 각 밀레트마다 다르게 통치하였는데 정교회 신자들은 '룸 밀레트(millet-i Rûm)'로 분류하였고[* 여기서 나오는 '룸'은 로마를 뜻한다. 오스만제국은 당시 그리스인, 정확히는 [[정교회]] 신자들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스만 당국은 이 룸 밀레트의 관리를 그리스인들에게 맡겼다. 따라서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인뿐만 아닌 다른 정교회를 믿는 민족들까지 책임지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훗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 다른 민족들이 그리스어를 버리고 각자 민족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현재 발칸 반도의 복잡한 민족 갈등 문제가 오스만 지배 체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그리스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들 역시 오스만에 의해 폐위, 처형, 감금, 신체 절단 등의 형벌을 많이 당했다. 그러나 명목상 군주의 명령를 받아 권력을 누리는 유력자들이 상황 변화나 지배자들의 변덕에 따라 처지가 민감하게 변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인 권력자들의 불안한 지위가 특별히 그리스인 전체에 대한 민족적 탄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튀르크 혈통의 정통 귀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는 여러 모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배층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이 되어야 했으며, 기독교도는 딤미(Dhimmi)로써 무슬림에 비해 법적으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차별 대우이지만,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에 비해 특별히 훨씬 가혹한 탄압이나 착취를 받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자국의 지배권이 중요했지, 종교나 문화는 의외로 공평하고 관대했다. 일례로 아라비아 반도의 네지드라는 부족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가혹하게 진압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훗날 이슬람 극단주의화의 선봉이 되는 그 악명높은 와하브파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교리에 비춰볼 때 이교도를 봐주는 타락한 국가이므로 종교적으로 올바른 국가를 세워야한다며 들고 일어났던 것. 여담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반란이 진합된 후 와하브파는 전략을 바꿔 외세를 끌어들여 독립을 하는 방식으로 선회했고,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지원에 힘입어 민족주의에 기생해서 독립에 성공,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게 된다.] 훗날 그리스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인/기독교도라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국의 신민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면 편애 없이 다른 신민들과(터키인이든, 알바니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간에 상관없이)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알렉시스 조르바스는 터키인 사부로부터 산두리(악기 이름)를 배웠으며, 터키어 노래도 서슴치 않고 부른다. 또한 18세기 그리스를 방문한 유럽인에게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무슬림입니다."[* 다만 예수는 원래 이슬람교에서도 무함마드 바로 이전의 예언자로서 성인으로 우대받는다.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 자체가 야훼가 예수를 내려보냈음에도 아직 완전히 인간이 계도되지 않아서,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내려보냈다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두 민족은 완전히 섞여 있었다. [[부활절]]날 [[터키인]]들이 [[그리스인]] 마을에 놀러가고, [[라마단]]이 끝나고 3일간 계속되는 축제기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인]] 마을에 놀러갈 정도로 이들은 큰 갈등 없이 지냈다. 이러던 것이 공화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이민족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배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됨으로써 갈등이 급격화되고 독립 의식이 고취되었다. 발칸 민족들 간의 갈등 역시 그리스-불가리아인들의 경우처럼 오스만 지배 이전부터 있었던 갈등이 오스만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가,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발현되었다. [[17세기]] 이후 서방국가와의 외교교섭 등에 그리스인들이 많이 필요해지면서 오스만 제정은 기독교도인 그리스인들을 무역 담당자나 관료로 대거 기용했다. 이 때문에 '[[파나리오테스]]'라는 이름의 관료집단이 형성되었다. 이스탄불의 '페네르'[* Fener. 그리스어로 '등불'을 가리키는 단어인 '파나리온(φανάριον)'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페네르는 지명의 유래대로 동로마 제국 시절 보스포로스 해협과 금각만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던 곳인데 1453년 도시가 오스만에게 함락당한 이후 메흐메트 2세가 [[하기아 소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도시의 그리스인 또한 총대주교를 따라 페네르로 이주했다. 그후 페네르는 대표적인 그리스인 거주 지역이 되었다. 도시에서 그리스인이 거의 다 쫒겨난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페네르에 거주하고 있다.] 지역에 주로 거주한 상인계층을 따서 이런 별칭이 붙었는데,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인구의 약 2/5는 그리스인이었으며 오스만이 멸망하고 신생 [[터키 공화국]]이 세워졌을 때에도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그리스 독립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으나 [[불가리아]], [[세르비아]]인들과는 반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