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극진공수도 (문단 편집) === 일본 === 워낙 가라테의 유파가 많은 탓에 전통 4대 유파[* 송도관류(松涛館流), 강유류(剛柔流), 사동류(絲東流), 화도류(和道流)]에는 밀리지만 4대 유파 다음으로 많은 수련생을 보유한 유파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유파라고 하기는 조금 애매한 게, 일본의 가라테계에서 극진은 가라테가 아닌 '극진공수도'라는 별개의 무술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통 가라테 유파가 '~류'로 유파를 나누는 것과 다르게 극진은 '극진 공수도 xx관(혹은 xx회)'이라는 별개의 분류 방식을 사용하며, 가라테 유파간 교류전에서도 극진은 제외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야 시합 룰이 너무 다르니까--] 사실 극진공수도의 인기는 마케팅을 꽤 잘 한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에 '매스미디어 전략'이라는 단락이 있을 정도. [[카지와라 잇키]]의 [[공수도 바보 일대]]를 비롯하여 [[만화]], 동명의 [[도에이]] 사 [[영화]], 텔레비전과 잡지, 서적 등으로 홍보가 널리 이루어졌다. 심지어 '''통신교육''' 과정까지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만해도 극진공수도의 유명세는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수준이 아니었다. 공수도를 통신교육으로 배운다는게 언듯 듣기에는 [[야매]](…)스럽긴 한데 일단 교습서 중심인 만큼 한계는 있었지만 교재는 최영의 총재가 직접 집필했으며, 그냥 책자만 보내는 것은 아니고 회원을 모아서 합숙 등도 진행되었으므로 일종의 회원 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최영의가 유명해지면서 극진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극진도장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도장이 없어서 배울 수 없었던 청년들도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교육 과정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통신교육을 신청한 회원이 당시 4만명 규모였고, 그 중에서 유명 선수나 관장들도 많이 배출되면서 극진공수도의 저변을 넓혔다. 이처럼 과거에는 단련을 통해 강인해진다는 모토와 최영의 총재의 이미지가 겹쳐져 굉장히 [[마초|남성적인]] 이미지가 있고, 현대판 [[무사도]]로 보인 까닭에,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안면 타격을 금하는 점, 다리 걸기나 유술기 등이 없는 점,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공수도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오히려 전통 유파 출신인 점 등을 들어 극진은 오히려 전통 공수도보다도 실전에 약하다는 인식도 있어, 과거의 인기를 많이 잃은 상태이다. 사실 극진이 전통 유파보다 강하다는 인식이 퍼진 것은 고강도의 신체단련과 풀컨택트 쿠미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거기에 최영의 총재의 명성이 더해진 것이 큰 이유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브라질리언 주짓수]]나 [[무에타이]], [[종합격투기]] 등의 지극히 실전 지향적인 격투기의 보급이 확대되어 실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도 어려워졌고[* 특히 주짓수는 UFC 초창기 호이스 그레이시가 킥복서, 공수도가들을 제압하던 걸로 실전면에서 입증되었고 유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수월했고 주짓수 이야기를 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기무라 마사히코, 가노 지고로, 힉슨 그레이시의 명성도 최영의 못지 않다. 무에타이 역시 주짓수 만큼 큰 족적을 남긴 정도는 아니지만 k-1에서 일본의 타격기인 킥복싱과 가라테를 압도하는 모습으로 강력한 이미지를 자리매김했기에 보급에 크게 이바지했다. 종합격투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생활 스포츠 면에서는 일반인, 특히 여성이나 노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엄격한 신체단련이 필수인 풀컨택트 룰이 문제점이 되어 다른 격투기에 밀리는 추세이다. 말하자면 수련생들의 보편적인 강함[* 극진 특유의 신체 단련 중시와 버티기 식 시합 양상으로 인한 피지컬 향상 덕분에 아무리 안면 펀치를 비롯한 여러 기술 체계가 없다 해도 극진 검은띠 정도의 수련생을 그냥 운동 좀 해본 수준의 일반인이 이기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다.]-예를 들면 수련생 전원 최소 검은띠화 라거나-를 추구하다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 극진보다 더 과격하기로 유명한 무에타이조차도 선수를 양성하는 코스와 일반인들이 취미로 즐기는 코스가 확연히 분리되어 있는 편이다. 이는 자체적인 대회 체계를 갖춘 모든 무술이 마찬가지이다. 1994년 4월 26일 최영의 총재 사망 이후 극진회관은 두 개의 분파로 분리되었다. 하나는 마쓰이 쇼케이를 2대 관장으로 인정하는 극진회관(IKO1)와 최영의 총재 사망 이후 조직을 민주적 조직으로 성장하기 위해 분리된 극진회관(대산파)로 나눠졌고, 이 두 파는 오랜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이후 IKO1에서 로야마 하츠오 고문이 독립하여 극진관(IKO5)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며, 극진회관 대산파는 산빼이파를 거쳐 현재 미도리 겐지가 대표를 맡고 있는 신극진회(WKO)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극진회관(대산파)에서 하세가와, 오니시, 오카다 등의 사범이 떨어져 나온 단체가 극진연합회로 이어진다. 극진연합회에서 다시 하세가와 사범과 오니시 사범이 70%이상을 분파해서 만든 단체가 세계총극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