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근세 (문단 편집) == 상세 == '근세'(近世)란 [[중세]]와 [[근대]] 사이라는 개념으로 쓰이는 시대 구분으로서 특히 [[로망스어군]] 언어권에서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미권과 독일어권을 위시한 [[게르만]]권에서는 'Early Modern/Frühmoderne, Frühe Neuzeit(근대 초기)' 등을 의미한다. 사실 동양에서 부르는 명칭인 '近世(근세)'의 기원은 일본 [[사학자]]들[*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필두로 한 [[교토대학|교토대]] 계열 학파에서 두드러진 성향이다. [[도쿄대학|도쿄대]] 학파는 초기에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이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식 시대 구분론[*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 시대 구분 방식에 '생산력'과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을 도입하면서 일본사에 적용한 때 [[에도 시대]]를 어디에 넣을지 생각하다가 근대는 아닌데 중세로 보기엔 좀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어]]의 'Époque moderne'(에포크 모데른)을 직역하여 '긴세이(近世)'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사에서 근세는 곧 [[에도 시대]]이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로 정의한다. 더 세부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를 근세, 이후부터 철종의 재위기간까지를 근대 태동기, 고종의 재위 및 흥선대원군의 집권부터는 근대로 정의한다. [[중세]]의 끝과 함께 시작이 애매한 편인데, 대개 [[동로마 제국]]의 멸망,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근세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근세(近世)'나 '근대 초기(Early Modern)'라는 시대 구분 대신으로 그냥 '중세 말기'로 보는 경향도 있다.[* 특히 일부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장기 중세'라고 하여 18세기까지도 중세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애매함으로 인해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 표기는 안 하며, 시대 명칭이 확실한 근대[* 대체적으로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을 시점으로 보고 있다.]부터 시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 사실 유럽 기준으로 근세를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유럽식 시대 구분론 자체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형태로 이뤄졌고, 이것이 현시점에 와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면 근대, 그 이전이면 중세'''라는 쌈박하고 심플한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는 대부분 중세로 취급된다. 다만 예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를 따로 구분한다 * 한편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라는 또 하나의 시대 분류를 집어넣는 것이 꼭 예술사 분야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치사 분야에서도 <[[봉건제]]가 주도적이던 중세> 다음에 <[[절대군주정]]의 확립이 일어난 근세>, 또 그 다음 시대를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정치 이념의 맹아가 자라기 시작한 [[근대]]>로 분류하는 시대 구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심지어 경제사 분야를 보더라도 "원거리 교역망의 붕괴로 경제구조가 파편화된 중세 초기"와 "상인 조합, 정기시, 교역도시와 도시동맹등이 등장하여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경제망이 복원된 중세 후기",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본격화된 근대" 사이에 "[[중상주의]]의 근세"를 집어넣는 분류는 흔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면 근대, 그 이전이면 중세"라는 '''쌈빡하고 심플한 기준'''은 현 시점에서 사용되는 구별기준이라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중세/근대라는 구별을 처음 시도했던 시절, 즉 19세기~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이 자산들이 속한 시대를 근대(modern)로 정의하고, 그 이전을 아직 발전하지 못한 시대라 하여 '중세'라 부르던 시절에나 사용했을법한 기준이며,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이러한 기준에 대해 되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위 내용은 "유럽사의 시대 구별에서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지만 그 사이에서 근세를 구별하는 기준은 불명확하다"는 관점으로 씌여졌지만 사실은 중세나 근세, 근대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를 구별하는 기준은 모두 불명확하고 유동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처음 '중세'라는 구별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오히려 명확한 시대 구별이 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그 후 역사학 및 인문학의 발전에 따라 명확하고 객관적인 시대 구별의 기준을 찾을 수는 없고, 저자와 각 연구자, 독자들의 공감대에 따라 사안마다 적절하게 합의되어야 할 문제라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 기간에 벌어진 대표적 시대상이라면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시대]], [[절대왕정]], [[30년 전쟁]] 등이 있다. '[[해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또한 근세의 해적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대항해시대]]가 속해 있기에 그런 듯. [[유럽]]인들에겐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잘나가기 시작한 시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가 왕국들과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 내륙과 유럽의 정복이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시대이기도 하다. 허나 유럽인들에게도 마냥 좋은 시대는 아니었는데,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역사상 가장 추운 시기중 하나였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전란과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마녀사냥, 30년 전쟁, 대홍수 같은 인외마경들이 바로 근세 [[소빙하기]]의 작품이었고, 각종 기근과 전염병도 중세 후기에 비해서 많아졌다. 전쟁사적으로도 꽤 환경이 달라지기도 했다. 중세의 전쟁의 양상은 보통 중갑을 입은 기사들과 그것을 막는 보병 방진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기사들은 갑옷과 창을 발달시켜 사슬갑옷에서 끝내 풀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긴 랜스를 장비했으며 보병들은 방패를 버리고 긴 창을 장비하면서 그걸 뚫어내는 기사와 막아내는 보병 방진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화포가 점점 발전하면서 중기병의 모습은 점점 갑옷을 벗어내 가볍게 무장하고 중요부위[* 주로 심장을 지키기 위해 가슴 부분]만 지키는 흉갑기병들이 주로 나타났으며 보병들은 총이 발달함에 따라 개인 화기의 길이를 늘리고 총검을 달아 멀리서는 사격을 하다가 근접하면 방진을 구축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다 근대에 와서는 흉갑기병마저도 축소되어 경기병에 흡수 되었고[* 이후 중기병대가 수행하는 돌파의 역할은 현대에 와서 전차가 대신하게 되었다.] 야전은 총을 든 병사와 화포가 주축이 되었다. 다만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무기의 발전이 더디어 윙드 후사르와 같은 중기병대가 활약을 하였다. 관(官)과 민(民)의 개념이 대두하기 시작하고 공권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억누르고 서민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시작한 시기이도 하다. 민권이 토대로 성장한 왕권인 만큼 유지하고 행사하기 위하기라도 서민들을 지원해주어야만 했다. 서양사의 사례를 보아도 영주와 기사 중심의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왕권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에만 해도 변변치 않던 왕권이 민간의 힘을 안 시기이며, 소위 왕권에 해당하는 '관권'과 서민에 해당하는 '민권'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명예혁명]]시기,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 이 왕권은 왕 독단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상권, 즉 민권을 대변해주어야 유지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가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머스 홉스]]의 [[왕권신수설]] 등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근세'하면 떠오르는 르네상스 시대, 대항해시대 역시 '왕권을 중심으로 한 무역과 상업 확장'이라는 전제가 반드시 들어간다. 동양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게 한중일 모두 이전 시대에 비해 관과 민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이는 근대사회에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기가 종식되고 통일왕조의 형태를 성숙하게 운영해 나가는 시기이며 이는 중앙과 지방세력, 이민족과 한족이 비교적은 균형있게 정계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성행한 성리학과 과거제, 은(銀)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의 운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계급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는 시기였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비록 지배계층의 위치는 유지했지만, 중앙정부와 민간(특히 부를 이룩한 부농이나 거상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막부와 지방세력, 성장하는 상인들의 상호 견제는 나중에 근대 일본이 탄생하는 데 기본적인 틀이 되어주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들은 강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남용하면 바로 신권의 견제로 이어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인 [[반정]]이나 조선시대의 [[사관]]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왕이어도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영역이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연산군의 재위기간이었다. 연산군은 왕권을 무리하게 남용하다가 신권에 의해 퇴위된 조선시대 첫 사례이다. 현재, 중종반정이 발생한 이후가 조선중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실재로 지방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세는 조선후기 숙종대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숙종 재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으로 다시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게 됐다.] 즉, 다시 말하면 중세의 혼란기를 이겨내고 왕권과 신권, 민권이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력 양상의 반복은 잘 알다시피 이후 근대 [[자본주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됐다. [[중동]] 및 [[이슬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시대 구분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압바스 칼리프가 분권화의 압력에 사실상으로 해체되고 그런 대로 잘 짜진 법률 체계와 종교 및 민간 부분을 관료제로 포섭하면서 주변 지역을 왕성하게 정복하는 국가들이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시기를 이전의 '중간 시대'와 구분해 '화약 제국의 시대'라고 하는 '근세'로 파악한 것이다. 그 나라들이 바로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그렇다고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 [[사파비 왕조]]는 [[이란]], [[무굴 제국]]은 인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물론 [[오스만]]과 [[사파비 왕조]]와 [[무굴 제국]]이 현대 [[튀르키예]], [[이란]], [[인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국들인 것은 [[맞는다]]. 특히 튀르키예의 경우는 아예 직계 국가니까. 하지만 [[오스만 제국]]만 해도 제국 내 40%가 비무슬림이었고, [[튀르크]]인 비율은 더욱 적었으며, 제국의 관료들과 장교들 대부분은 발칸의 데브시르메로 징집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이었다.[* 제국 초창기에는 '지배층 = [[튀르크]]인'이라는 공식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는 제국의 지배층에서 [[튀르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감소하고, [[쉴레이만 1세]] 시대가 되면서 [[튀르크]]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다만 이것은 인종적인 이야기지, 공용어는 여전히 [[페르시아어]]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오스만 터키어]]였고, 지금 튀르키예인을 [[튀르키예]]에 사는 [[튀르키예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함을 생각해보면 이들도 어찌보면 튀르키예인으로도 볼수 있다.] 사파비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에 기반한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사파비 왕조의 기반은 현재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튀르크인[* 이들을 일컬어 키질바시(Qizilbash, '붉은 머리')라 한다.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아바스 1세]] 때까지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다.]이었고, 지금도 이란 인구는 약 30%가 [[튀르크인]]이다. 무굴 제국도 인도에 있었지만 공식 문서는 이슬람 세계의 학술 용어인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고, 창건자인 [[바부르]]는 튀르크화된 몽골계였으며 지배층 가운데에는 튀르크인이 많았다. 세 국가 모두 페르시아화된 튀르크인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지만, 각자의 제국을 통치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한 종파와 [[문화]]에 따라 [[수니파]]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문화를 이슬람화한 오스만 제국, 유일한 시아파 교법 국가로서 페르시아 문화를 선택한 사파비조, 그리고 인도 방면으로 내려가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 문화의 조화를 추구한 무굴 제국으로 갈라졌다. 전근대 국가가 바로 뒤의 근대 국민 국가로 이어졌던 것은 국가적 강역이 지리적인 격리로 인해 일찍부터 엄격히 분리된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일이지만, 이 동네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아니,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동아시아가 세계사적으로 예외적인 경우라 봐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