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근육조선/역사 (문단 편집) === 만주 === [[송화강]] 서쪽까지의 만주는 조선이 명에게서 넘겨받아 세력권에 둔다. 그리고 강한 자를 숭상하는 유목민의 특성과 장병부터 왕까지 입신체비로 강해진 조선의 특징이 맞물려 조선이 여진을 완전히 흡수해 버린다. 새로 섬기는 왕은 웬만한 부족장 따위는 뺨칠 정도로 힘센 장수에, 입조 후 새로 할 일이라고는 아직 조선에 적대적인 부족들을 '평소 하던 대로 털어버려'라는 신나는 것이고, 조선에서는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조선은 모르는 일이니까 명나라에서 말 안 나오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놀아라'는 식으로 대놓고 뒷배를 봐주겠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부족의 후계자들을 데려다 교육시키고 관직도 내려주고, 물품 교역 때는 좀 떼먹긴 하지만 몇 배 이상을 후려친 명 시절보다 훨씬 양심적으로 값을 쳐 준다.[* 아구지가 명나라와 거래하던 시절 계산으론 잡곡 150석에 불과한 모피가 조선과의 거래에선 쌀 750석, 이것도 절반 이상 후려친 거라고 하니 그간 명나라가 얼마나 떼먹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니 여진 입장에서는 입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신기오로 충샨]]이 조선에 귀부하자 후일 나타날 청나라의 싹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누르하치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그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은 호주에서 광산을 운영하며 금을 캐고 있다. 만일 태어났어도, 이 광산주가 그렇듯 여진족 조상을 둔 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귀부할 당시에는 유목민족 특유의 수렵과 약탈 문화를 이어왔고 개척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홍일동이 개척 과정에서 따르는 노동이 아니라 강해지기 위한 '훈련'으로 만들어버리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조선의 북방 개척에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선과 동화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예 반쯤 농경민족화 되었다. 쌀이 잘 자라지 않는 북방이다 보니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으며, 서양처럼 밀을 빻기 위한 풍차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풍차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 밀은 겨를 벗기기 힘들어서 가루를 내서 빵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매 끼니마다 가루를 내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 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풍차나 수차 방앗간 근처에 마을이 형성되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조선인처럼 체격과 장비는 좋지만 유목 민족 특유의 기마술과 전투 능력은 사라졌다.[* 2부에서 몽골 [[케식]]이 이를 보고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근육'''으로 일반적으로 죽을 상황을 극복하거나, 각종 물자들을 아낌없이 공유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과 교류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은퇴하는 기병들이 북인들에게 기마술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고.] 2부 기준으로 흔히 북인(북쪽에 사는 사람)이라 불리며, 완전히 조선에 동화되어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손이라 여기는 좀 거친 조선인이 되었다. 고구려를 첫 조상, 금나라를 중간 조상이라고까지 말하는 상황. 정충렬의 가문 회령 정씨는 아예 조선의 일익으로 자리를 굳혔고 나머지 가문들은 사참을 운영하거나 토관 등으로 지내면서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호전적인 성격은 어디로 가질 않아서 내수린에 환장하는데, 채광하던 광부들이 교체 시기가 되어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한 일이 내수린장 건설일 정도다. 그런데 내수린을 너무 거칠게 하다 보니 부상률이 높아 '''낙법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낙법을 가르치기 전에는 부상률이 3할(30%)이었는데, 그나마 낙법을 가르친 덕분에 1할(10%)로 줄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