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5세기 ~ 6세기 (쇠퇴기) === 아무튼 5세기경이 되면 반파국 쪽 고령계 토기의 확산 등으로 미루어보아 금관국이 멸망까지 하진 않았지만 여러 가야소국 중 하나 정도의 위상으로 쇠퇴하고 그 대신 경북 고령에 기반한 반파국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등 내륙 지역이 크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반파국은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과 대부분의 가야 소국을 포괄하는 맹주격으로 올라서며, 백제 측 기록을 다수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도 5세기 ~ 6세기 가야권은 [[반파국]]과 [[안라국]]이 주도하고 금관국은 그리 돋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그런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신라가 경주에 가까운 대구 같은 옛 진한 지역들과 과거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창녕, 부산 같은 지역까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내실을 다지면서 더 이상 금관국이 [[낙동강]] 하구 수로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파국 등 낙동강 상류 국가들은 과거 수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김해를 우회해서 [[섬진강]] 같은 대체루트를 찾아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와 교류하면서 활로를 찾았고 그럴수록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김해 지역은 가야의 변방으로 몰렸다. 게다가 5세기부턴 반파국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계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김해가 일본과 가깝다는 위치상 당연하게 금관가야가 맡아왔던 왜국 방향 교섭마저 반파국이 주도권을 빼앗은 정황도 나타난다. 결국 김해 금관국은 532년 신라 [[법흥왕]]에 항복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앞서 529년에 신라의 [[이사부]]가 이끄는 3천 군대가 왜국의 [[오우미노케나|오미노케나노 오미(近江毛野臣)]]를 쫓아내고[* [[창원]]으로 추정되는 [[탁순국]]왕 [[아리사등]]이 백제와 신라를 두려워해 왜국에 요청해 불러온 지원세력이다. 그러나 이사부가 [[다대포]]에 진을 치고 무력시위하자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퇴각해버렸다.] 돌아가는 길에 금관(김해)를 초략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기록별로 소소한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히 군사 충돌 없이 순순히 신라에 항복한 것처럼 나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고,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금관국과 [[탁순국]], [[탁기탄]]은 6세기 가야권에서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고 이것이 아직 남아있는 나머지 가야권 국가들에게는 신라의 확장이 큰 안보적 위협으로 다가와, 이 때부터 신라의 잠재적국인 [[백제]]나 [[왜국]]에 외교적으로 기울어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겨우 정세를 유지한다. 그러다 20여년 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크게 패배, 위축되면서 힘의 균형이 깨져, 이후 약 10여년간의 기간 동안 나머지 가야 소국들도 하나하나 신라가 흡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