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3세기 후엽 ~ 4세기 중엽: 삼국 시대 '가야'로서의 금관국의 출현과 그 전성 시기 === 격상된 연대론에 의하면 3세기 중후엽, 신경철 교수를 위시한 [[부산대]] 쪽 편년에 의하면 3세기 중후엽에는 김해 세력에 도질 토기가 초현하며,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기존 목곽묘보다 압도적인 크기와 엄청난 양의 도질 토기, 철기, 동기들이 부장된 대성동 29호분이 축조된다. 이는 3세기 이래 여러 김해 지역 집단 가운데서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우위를 점한 가운데, 결국 이들이 다른 고분군 축조 세력보다 격절된 존재, 즉 왕권의 출현한 것으로 본다. 당대 최신 기술의 총아인 도질 토기가 제작됐다는 건 유의미한 현상이다. 도질 토기는 표면에 유리질이 형성되어 토기의 방습성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이전 시기 토기보다 기벽에서 습기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므로 훨씬 가벼우며, 손가락으로 퉁겼을 때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인 토기이다. 이 도질 토기를 소성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정성된 태토를 구해야하며, 고화도를 견딜 수 있고 표면에 유리질을 형성할 수 있는 섞음 광물들의 위치와 정선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가마를 섭씨 11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수십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고도의 밀페 기술과 소성 기술과 그 화력을 내는 데 있어 막대한 목재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력과 자원(나무 등)이 소모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러한 당대의 사치재인 도질 토기를 소모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계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금관 가야에서 도질 토기의 출현은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첨단 제작 기술과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계층과 경제력의 존재를 상정한다. 거기다가 다른 영남 지역과는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그것을 자신들만 부장하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관국은 적어도 영남 지역 내에서는 고고학적 지표로는 가장 선진적인 단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전 단계와는 격절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로 이 시기부터 '금관 가야' 혹은 '금관국'으로 보기도 한다(이전 시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변진 구야국으로 호칭, 어디까지나 획기와 변화를 중시하는 학술적 용어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획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북방 기마 민족이 남하하여 기존 집단을 멸망시키고 선진 문물로서 금관 가야를 건설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방계 요소인 게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모두 합친 것들이며, 북방 청동솥 같은 유물은 [[평양]]에도 출토될 정도로 해상 교역을 통해서 얼마든지 입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전 시기 분묘의 파괴 현상은 오히려 묘역을 중시여겼기 때문에 나타는 현상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전 시기 분묘의 파괴 현상은 대성동 고분 전시기에 거쳐서 고르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성동 고분군이라는 묘역을 아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현상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질 토기는 일시에 성립한 것이 아니며, 액체를 주로 담는 용기인 단경호부터 다른 기종까지 서서히 도질화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남하로 인해 금관국이 성립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해상 및 [[낙동강]] 유역 교역망에 힘입어 힘과 기술 수준을 키운 금관국이 빠르게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세기를 전후한 시기가 되면 강 건너 동래 세력(변진 [[거칠산국]]으로 비정)의 [[복천동 고분군]]에도 [[대성동 고분군]]과 금관국 양식의 토기를 공유하며 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인 통형 동기, 파형 동기 등의 위신재를 공유한다. 그러나 고분에서의 양상은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보기 힘들 만큼 엇비슷하기 때문에 [[동래]] 지역의 [[거칠산국]]과 [[김해]] 지역의 [[금관국]]이 동맹, 혹은 연맹 상태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 금관국 양식의 토기는 김해 지역에서는 북쪽으로는 진영 분지, 서쪽으로는 장유, 마산 일대까지 출토되며, 부산 쪽에서는 북쪽으로는 지금의 양산 신시가지 바로 턱밑인 북구 금곡동, 율리패총 일대, 동쪽으로는 철마면 일대까지 출토된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 성과로 보아서는 금관 가야의 정치체의 형태라든지 영역 범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위의 내용 또한 논리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데 금관가야와 거칠산국이 동맹 혹은 연맹으로 보는 근거는 위신재의 공유 현상에 기인한다. 즉 통형 동기의 공유가 그 근거인데 이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통형 동기가 대성동 집단이 복천동 집단에게 사여 혹은 분배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보식 2000년 「고고학으로 본 금관 가야」 『고고학으로 본 가야』 한국 고고학회 김영민 2008년 「금관 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그러나 실제로는 분배의 주체인 대성동 고분군보다 받는 입장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오히려 통형 동기가 많이 출토되는 양상이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통형 동기 자체도 금관 가야의 독자적인 유물이 아니라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왜계 유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두 집단이 경쟁적으로 왜계세 력과의 교역을 통해 입수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특정 정치체의 유물의 분포 범위 = 특정 정치체의 영역이라는 공식 또한 일반론적인 주장인데 유물의 분포와 확산은 단순히 정치적 움직임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 교환 등 인간의 교류 행위 자체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특정 유물이 그 지역 내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을 영역화 혹은 정치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치체의 영역화 과정은 단순히 특정 토기 양식의 분포 범위를 가지고 설명 할 수 없다. 최근에 신라 영역화 과정에 대한 연구나 대가야의 중앙 집권 단계 과정의 연구 등을 살펴보면 토기 양식의 유입뿐만 아니라 위신재의 분배 그리고 매장 주체부의 형성 등 다양한 단계를 걸쳐 진행된다. 아직까지는 금관 가야는 이러한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금관 가야는 [[낙동강]] 하류역의 정치 경제권을 권력을 쥔 세력으로 볼 수있다. 신경철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이 시기 금관국은 경쟁국인 [[안라국]], [[사로국]]을 누르고 '[[영남|영남 지방]]의 패자'라 할 정도로 발전한 면모를 보여준다. 금관국이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낙랑]]과의 교역이 큰 동인으로 보고, 313년, 314년 [[낙랑]] [[대방군]]의 멸망으로 금관국이 쇠락했다고 보고, [[신라]]가 되는 [[사로국]]이 본격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313년, 314년의 낙랑 - 대방 멸망으로 금관국의 대외 교류 기반이 붕괴되고 변한 각국 내에서 리더쉽이 도전받는 가운데 훗날 [[반파국|대가야]]가 되는 [[반파국]]이 부상했다고 보았다. 한 발 나아가 후술한 400년 경자년 전쟁도 실은 금관국이 아닌 [[반파국]]과 [[왜]]의 연합작전으로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대성동 88호분, 91호분에서는 북중국의 삼연계 문물(북연, 전연, 후연을 합쳐 이르는 말)인 삼연계 대장식구와 함께 로만글라스, 장식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학설은 재고되어야 한다. 금관국이 이러한 문물을 입수한 경로가 해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낙랑군]]과 [[대방]] 지역의 한(漢)족계 세력은 4세기 중후엽까지도 그 세력을 유지했다. 최신 학설에 의하면 이들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370년대 [[근초고왕]]의 [[낙랑]], [[대방군]] 공격으로 본다. 그리고 대성동 88호분과 91호분에서의 이는 현재까지 [[신라]] 최초의 금공품 및 로만글라스, 장식마구류와 함께 [[신라토기|신라 양식 토기]]가 출토된 월성로 가 13호의 연대인 4세기 말보다(부산대 편년에 의하면 5세기 2/4분기) 최소 50년에서 최대 100년 정도 빠른 것이다. 물론 경주 분지 일대에서 4세기 대로 소급되는 고분의 조사가 거의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이지만[* 최병현 교수의 경우 4세기 대 사로국의 고분이 존재 할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현재 조사 중인 쪽샘 일대를 지목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의 양상이나 문헌 사료의 양상으로 볼 때 4세기 중엽 시점까지 금관국이 [[사로국]]에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난데없이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나타나 당시 금관가야의 중계 무역의 핵심 역할을 하던 낙랑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독점하자 금관가야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다.[* 금관가야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고순사국 등 가야 연맹의 일부 국가들이 연합하여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금관가야는 겨우 이를 진압했지만, 가야 연맹은 크게 흔들렸었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에 계속 패배하던 백제는 형제국이나 다름없었던 왜와 연합하는 동시에 가야에게 동맹 제의를 하게 되고, 가야는 이를 수락하여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파트너로 택하고 고구려의 우방이었던 신라를 쳤다. 인접국인 신라를 멸망시키면 가야는 자동적으로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되고, 행여나 백제와 왜를 도와 더도 덜도 말고 낙랑지역을 탈환하는 것을 도운다면 경제적인 회복도 기대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철천지 원수인 후연과 치열히 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는 위로는 중국의 왕조 및 북방민족들과 접환 특성상, 고구려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쪽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중국의 왕조 및 북방민족들이 가장 위험한 주적이었다.] 때문에 백제는 칼끝을 후연으로 돌린 고구려가 남쪽의 일까지는 큰 신경을 쓰지 못할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가야도 이에 공감하여 이득을 보려 백제 편을 들어 신라를 침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