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4세기 중후엽: 사로국의 대두, 그리고 경자년의 전쟁으로 인한 금관가야의 몰락 === 한편, 금관국의 라이벌로 부상하던 [[사로국]]의 경우 4세기 말로 편년되는 월성로 가 13호에서 로만글라스와 같은 대외 무역품과 함께 완성된 형태의 장식 마구류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토기 양식이 완성된 형태로 반출되고 있기 때문에 늦어도 1분기 ~ 2분기 정도 빠른 4세기 중후엽 정도에는 신라의 모체가 되는 사로국도 금관국과 비슷한 단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황제 [[부견]]과 신라 사신 위두의 대화도 37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정확히는 382년이다. 대화내용은 부견이 해동(한반도)의 정세가 바뀌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위두가 시대가 바뀌었으니 정세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내용.]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지금의 [[양산신도시]], 물금읍 일대인 황산진을 두고 금관국과 사로국이 충돌하는 기사, [[거칠산국]][* 일설에 의하면 [[독로국]]과 같다고 보기도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독로국을 거제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추정하고 있다.] 정복 기사 등은 사로국과 금관국이 대치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지역들은 고고학적으로 나타나는 금관 가야의 최대 강역이거나, 거기에 인접한 외곽 지역(황산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로국이 부상하는 데에는 올려잡자면 313년, 314년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그 파급 효과, 그리고 직접적인 타격은 [[근초고왕]]의 낙랑, 대방 지역 평정으로 인하여 동북아 교역에 종사하던 해상 집단의 소멸로 금관국의 대외 교섭 능력이 위협받는 것과 관련있다. 거기다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주체 교체론적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면 근초고왕이 직접 가야를 평정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시기 전통적으로 기능하던 해상 교역로가 기능이 정지되고, 백제의 평정으로 금관국의 관문 역할과 주변 소국에 대한 리더쉽은 도전받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영남 지역이면서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지 않아 전통적으로 금관국의 교역로 영향력에 벗어나 있던 사로국은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고구려와 연합 전선을 펼친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 경주를 포함한 울진, 영덕, 포항, 울산 등은 낙동강 유역에서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낙동강 유역과는 다른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끝은 북방의 [[옥저]]와 [[동예]], 그리고 [[고구려]]로 연결되는 관계망이었다. 그중에서도 경주는 낙동강 유역인 양산, 영천과 바로 인접해있기 때문에 영남 지역 내에서도 동해안 관계망과 낙동강 관계망의 결절지인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낙동강, 중국, 왜 관계망이 흔들리자, 경주의 사로국이 [[고구려]] - [[동해|동해안]] - [[사로국|사로]]로 이어지는 관계망을 통해서 빠르게 영남 지역에 영향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사로는 앞서 말한 낙랑 대방군의 소멸, 그리고 완전한 한인 해상 교역 집단의 소멸, 근초고왕의 가야 평정과 무관한 상태로 힘을 보존하고 있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증대되는 동해안 관계망의 중요성과 고구려의 부상으로 신라가 힘을 얻고 있었다. 고구려 또한 경쟁국인 백제가 장악한 낙동강 서안의 가야 관계망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해안 교역로로 연결되면서 금관국 못지 않게 힘을 키우고 있던 사로국이 적절한 파트너였다. 즉, 4세기 중후엽이 되면 금관가야의 영향력이 내외부적 요인으로 축소되고, 오히려 신라의 힘은 증대되고 있었으며 그 세력이 서로 교차하는 와중에 황산진과 거칠산국 등지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4세기 중후엽 어느 시점부터 출현한 [[신라토기|신라 양식 토기]], 그리고 고총 고분의 등장은 3세기 후엽 '금관 가야'의 출현처럼 '사로국'과 격절된 '신라'의 출현으로 상정된다. 신라는 빠르게 안강, 울산, 영천, 경산 등의 주변 여러 지역을 장악해 단순히 경주의 성읍국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으며 그 후로 금관국의 낙동강 동안 최대 배후지인 거칠산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4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동래]] [[복천동 고분군]]의 수장묘에는 신라 양식으로 흔히 이해되는 出자형 입식이 달린 금동관과 신라토기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이단교호투창고배'의 초현형식 등이 부장된다. 그러나 여전히 금관국의 토기와 문물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동래 지역에 가해지는 신라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 애초에 동래 지역은 단층대로 경주 분지와 바로 연결된다. 신라로서는 낙동강 관계망을 틀어진 금관국의 견제를 위해, 또 고질적인 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서 동래지역 장악이 절실했다.] 그런 반면 김해 금관국은 앞마당인 부산 정도를 제외하면 김해 세력 혹은 문화의 확장을 유추할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정도다. 김해 + 부산 정도에 그 부산마저도 신라색이 점점 침투해 빼앗기면서 신라와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김해 지역이 알짜배기라 해도 커버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4세기 말엽이 되면 신라는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를 지나 [[현풍읍|현풍]]과 [[창녕]](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심지어 6세기까지 창녕의 비화 가야가 존속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까지 진출하여 금관국이 쥐고 있던 낙동강 관계망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하는 형세가 된다. [[삼국사기]] 기록에 일시적으로 낙동강 서안인 [[초팔국]](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다라리 일대)까지 정복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낙동강 서안까지 진출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시적 진출로 본다. 고고학적 자료는 5세기 대 [[합천]] 지역의 세력이 가야임을 보여주기 때문, 물론 [[고령군|고령]]의 [[반파국]] 문물과 [[가야토기 #s-2.5.1|창녕 토기]] 및 신라 출자형 금동관 등 신라 문물이 서로 경쟁한다. 이 지역이 낙동강 중류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웅다웅했던 것의 흔적으로 본다]. 거기다가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 [[칠곡지구]] 분지를 지나 [[경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의성]] [[조문국]]을 복속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고, 동쪽으로는 [[강원도]] [[삼척시|삼척]]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는 금관국의 관계망을 심대하게 위협하면서 경북 북부 지역, 동해안 지역마저 장악하였고, 최후의 요충지이자 금관국의 최대 배후지인 동래 지역을 쟁탈하기 위해 압박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금관국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응하게 된다. 신라의 낙동강 하구 진출로인 황산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4세기 말엽의 금관국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장악했던 국제 관계망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금관국의 리더쉽은 추락했기 때문에 금관국으로서는 이미 덩치가 커질 대로 커져버린 사로국에 홀로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금관국의 최대 파트너였던 거칠산국의 중심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확대되는 신라계 문물로서 확인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금관국은 단독으로 신라와 결전을 치루기 보다는 전통적인 파트너인 [[왜 #s-2]]와의 연합군을 편성하고, 백제의 협조까지 받았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신묘년 왜의 도해와 경자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신라성 포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선 금관가야와 왜는 앞서 말한대로 3세기 ~ 4세기 내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형 동기, 파형 동기 같은 위신재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미 그전부터 해상 교류로 맺어진 사이라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 예안리 고분군 출토 야요이 시대 석제품도 그 예]. 왜는 [[철(원소)|철]]의 제련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국가로서의 중요한 자원인 철을 금관국의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왜에 출토되는 아래위 대칭의 개뼉다구 모양의 철정은 기실은 모두 대성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한편, [[왜 #s-2]] 정권도 전통적으로 철을 제공받던 파트너인 금관국의 영향력 약화를 좌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의 공급이 자신들의 정권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전통적으로 왜와 자주 충돌하는 국가였으므로 신라의 확장은 더더욱 좌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양자의 합의가 맞아 떨어져 [[391년]] [[신라]] 침공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신묘년 기사이다. 그리고 경자년인 서기 [[400년]]에는 대규모 침공이 이어져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성이 함락되고 신라[[매금왕|매금]](동이매금)이 도망쳐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빌고 빌 정도로 전황이 악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낙랑]], [[대방]]을 무찌르고 [[백제]]와 경쟁하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자신의 배후 세력인 [[신라]]의 위험, 그리고 [[백제]]의 배후 세력인 [[가야]]와 [[왜]]의 공격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장포스|직접 보기 5만 명을 몰고가서]] [[경주 월성|월성]]에 주둔해있던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면서, 금관국의 왕성으로 여겨지는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밀어붙여 연합군을 분쇄시켰던 것이다.4년 뒤 금관국은 백제,왜와 힘을 합쳐 연합군을 결성해 다시 한 번 고구려에 맞서지만 대패한다.고구려군에게 밀리고 밀려서 당시 동맹국이었던 왜의 군사가 본국으로 퇴각을 결정할 정도로 전황이 참담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전쟁으로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고 가야 연맹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