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후대의 전래 == * 다른 가야 여러 나라들에 비해 구형왕은 항복한 뒤 원래 영역인 김해를 [[식읍]]으로 받은 뒤 신라 [[골품제|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비록 후기에는 약해졌다지만 한때는 변한, 가야에서 가장 유력한 국가로서 대내외적 상징성이 있었던 점과, 다른 가야 소국에 비해 비교적 먼저, 큰 저항 없이 순순히 투항한 것이 신라 사회에서 높은 대우를 약속받게 되었다. 구형왕의 첫째 아들 [[김세종]]은 장수로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공을 세우며 [[상대등]]에까지 올랐다. 셋째(막내) 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수가 되어 [[진흥왕]] 대의 대대적인 영토 확장 시기에 활약했으며 특히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를 확정지었던 [[관산성 전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형왕의 증손자이자, 김무력의 손자인 [[김유신]]은 삼국 통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죽은 후 유례없는 왕으로의 추증[* 무예를 흥하게 한 대왕, 흥무대왕(興武大王).]을 받게 된다.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 또한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했다. 또한 신라 [[문무왕]]은 [[문명왕후|모계 쪽]]으로 금관국 왕실의 혈통을 잇고 있기 때문에 신라 중대 왕실과도 연관이 깊다. 그래서 문무왕 본인도 김수로왕의 능역과 제사 관리에 꽤 신경을 쓰기도 했다. * 금관국의 [[수로왕]]과 왕후 [[허황옥]]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이다. 덤으로 김해 허씨에서 사성으로 인해 갈라진 인천 이씨와 같은 뿌리이다. 특히 김해김씨는 모든 [[한국의 성씨]]를 통틀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제1성씨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게 번성하고 있고 이는 고백신발 왕조의 후예인 [[횡성 고씨]], [[부여 서씨]], [[의령 여씨]], 신라계 [[김씨]], 신라계 [[박씨]], [[월성 석씨]], 발해계 [[태씨]]는 물론이고 고려의 [[개성 왕씨]], 조선의 [[전주 이씨]]보다도 수가 많다. 비록 상당수는 조선 후기에 족보위조 등으로 편입된 것이란 비판이 있는데, 이들도 김해 김씨의 명성이 당대에 높았기 때문에 특히 김해 김씨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 알려져 있는 역사서는 [[개황력]]과 [[가락국기]] 정도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까지 전해져 있지 않으며 [[삼국유사]]에 일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가야에는 왕명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정도로 남아있는 게 다행일 정도. * [[고려]]왕조 [[문종(고려)|문종 인효대왕]]의 아들 왕비의 봉국이 금관국이었다. 작위는 [[후작]]. 또한 중국 [[송나라]]의 [[고려도경]]엔 고려가 [[제후]]에게 준 [[만월대 내 별궁|금관궁]](金冠宮)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금관궁은 금관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2017년 11월 금관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http://naver.me/5r6N3XJn|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대형 건물지군·의례용 유물 발견되었다.]] 위의 항목에서 서술하는 봉황토성이 이 봉황동 유적과 거의 붙어있다. 이 유적에서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과 토성 위에서 목책의 흔적이 조사됐다. 다만 이 정도로 왕성이란 직접적인 증거로 확정하기엔 좀 부족하다고 한다. * [[부산광역시]] [[강서구(부산)|강서구]] [[가락동(부산)|가락동]]의 지명이 금관국의 이칭인 가락국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김해군 가락면이었다가, 1989년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돼 현재에 이른다. * 삼국유사가 인용한 [[개황력]]이 금관가야에 대해 저술한 것으로 보이나 현전하지는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