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2세기 ~ 4세기 (전성기) ===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등장하며 적어도 2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4세기까지는 변한(가야)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지역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기록된 [[변한]] 시절을 보면 구야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안라국]](안야국)과 함께 변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눈에 띄게 독자적인 호칭인 진지렴(秦支廉)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진왕]]이 있는 [[목지국]]을 제외하면 한반도의 마한 55국, 진변한 24국을 통틀어서 독자적 우대호칭은 단 4개 나라만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삼한에서 독자적 호칭을 가진 4개 나라는 각각 [[침미다례|"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라국|"안야축지(安邪踧支)"]], [[신분활국|"분신리아불예(濆臣離兒不例)"]], [[금관국|"구야진지렴(拘邪秦支廉)"]]이다.] 영남지역에서는 함안의 [[안라국]]과 함께 둘뿐인 사례다. 고고학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전까지 국제 교역을 담당하면서 위세를 떨쳤던 [[사천시]] 늑도와 [[창원시]] 다호리가 쇠퇴하는 가운데 초기에는 김해 양동리, 3세기부터는 김해 대성동을 중심으로 일국을 이루고 점점 커져, 4세기까지 김해 지역은 낙동강 유역 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나온다.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유리|로만 글라스]]까지 나오고, [[순장]]제도도 시작돼 고대사회에서 소중했던 인력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도 별 문제 없을 만큼 국력이 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해 지역은 다른 가야 소국들에 비해 초기에 성장하는 데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삼국지 위지에서는 변한이 나라에서 철을 생산해 한반도 각지, [[한사군]], [[왜국]]에 팔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 군현 같이 선진적이고 규모가 큰 외부 세력과 교역하는 경우 지금의 시군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수십개의 소국체들이 각자 교역하기보단 하나의 대표자가 등장해 일원적으로 교역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이익이다. 그리고 당시는 도로가 잘 깔려있지 않았으므로 낙동강 유역의 물자를 외부로 운송하려면 육로가 아니라 강과 연안 바닷길을 통하는 게 더 쉬웠다. 낙동강은 한강 같은 한반도의 다른 큰 강보다도 물길의 경사도가 매우 완만해서[*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는 최상류 지역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조금만 내려가면 물길의 경사도는 대부분 1만분의 3 이하로 떨어진다. 특히 하류 160km 구간의 경사도는 거의 0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현대 이전에는 강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역류하는 현상도 한반도의 다른 큰 강보다 심했다. 괜히 [[낙동강하굿둑]]이 세워진게 아니다. [[을숙도]]에 가면 하구둑 체험관이 있는데, 여기에 하구둑 건설 이전의 역사가 나온다. 하구둑을 짓기 전까지는 현대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부산광역시]]에서 무려 130km 떨어진 [[대구광역시]]까지 역류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상류로 항해하는 것도 쉬워서 고대부터 특히 수운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김해는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입구로 낙동강 유역의 물산이 모두 모여 지나가는 통로이자,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서 왜로 가는 경로를 김해(구야한국)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부터 일본에 이르는 연안항로와의 교차로이기도 한 김해 지역은 어차피 누가 어디를 가도 근처를 지나가는 지역으로서 지리적인 이점이 컸다. 왜와의 교역이 활발했다는 것은 왜계 하지키 토기도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역으로 김해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은 스에키토기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므로 확실하다. 삼국사기는 어디까지나 고신백 3개국 위주의 역사를 서술하므로 초기 신라(경주)가 주변 진한 소국을 정복하며 팽창하는 과정은 비록 편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단 이래저래 써 있는 데 비해, 김해 금관국이 변진 소국 사이에서 독보적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찾을 수 없다. 일단 [[고조선]] 영역을 [[비파형 동검]] 분포도로 파악하듯이 매장 유물로 세력권을 추정해보면[* 물론 이런 식으로 매장유물 분포도로 영역을 추정하하기는 요즘 사학계에서 비판을 매우 많이 받는다. 교과서의 고조선이야 워낙 답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퉁친 거다.] 김해 주변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외절구연고배를 통해 전성기 금관국의 영역은 지금의 '김해+부산+통합전창원' 정도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역의 결과라는 말도 많고, 4세기 부산([[거칠산국]])이 가야권이냐 신라권이냐는 특히 논란이 많은 떡밥 중 하나라[* 간단히 말하면 이 시기 부산 지역은 김해권 유물과 경주-울산권 유물이 함께 나온다. 이를 두고 학자에 따라 교역을 해서라고도 하고 속국이라서라고도 하는 등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 장담은 못한다. 다만 멀리 떨어진 경주의 신라와 가야가 여러 차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가야가 각자 그 주변 소국을 통솔하는 중심 세력이었다고 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다. 문헌기록에서는 '''건국 초기 [[수로왕]]의 집권 시절'''엔 근방 국가의 조율자 역할을 했고 신라의 침략을 번번히 격퇴했다. 기록상에는 당시 신라군이 '''1만 명'''이나 되었다는데 격퇴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강력했던 시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금관 가야 건국 전 100호에 '''약 75,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군 10,000명의 침략이면 자그마치 국민 인구의 1/7 ~ 1/8 이나 되는 대군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걸 건국 초기에 격퇴하고 동시에 근방 모든 국가의 준동을 중재할 정도면 '''건국 후 아주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는 증거이다.] 4세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아우르면서 낙동강 하구 유역을 장악해 막대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실제로 4세기 무렵까지 김해 지역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질과 양은 장난이 아니어서 경주(사로국) 지방과 함께 진변한의 양대 중심세력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마한에서 '구야진지염(狗邪秦支廉)'이라고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서 났다는 철을 한 군현과 왜에 팔기에도 용이한 지역이고(낙동강 하구), [[정사 삼국지|삼국지 위서 왜인전]]에서는 한반도 북서쪽의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가는 지리를 설명할 때 [[대마도|대마국]] 등과 함께 금관국(구야한국)을 중간 기착지로 설명하는데, 한반도에 존재했던 수많은 성읍 국가들 중 굳이 왜인조에 기준점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왜와의 교역 루트에서도 주요 중계 지점이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즉, 경제, 기술, 국제적 위상 등에서 매우 수준 높은 나라였다는 것이다. 가야의 최전성기까지만 해도 신라는 인구만 많았을 뿐 소백산맥에게 깔려서 적극적인 교류를 하지 못해, 실질적 영향력이 가야보다 약세였다.] 김해의 금관가야가 어느 정도 가야를 대표하는 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기록은 여럿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편년상의 문제점은 있다 해도 진한권 바깥의 낙동강 유역의 세력으로 가야만을 언급하고 [[파사 이사금]] 23년조에는 가야의 수로왕이 신라왕의 초대를 받아 사로국 주변의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분쟁을 중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마한]] [[진왕]]의 칭호가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로, 변한계 국가로는 안야국과 구야국을 언급하므로 구야국(금관국)이 대외적 중요성이 있었다고 볼 근거가 된다. 다만 현대 학설에 따르면 교과서에 실려있는 가야 연맹설의 논리대로 구체적인 연맹체 등을 형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인근인 부산의 [[거칠산국]]과는 워낙 가까운 지역이다보니 확실히 유착된 관계인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걸로 끝. 타 가야 소국에 중국제 사치품이나 철을 팔아치운 흔적은 보이긴 한다. 다만 신라 사서나 다른 기록상에서도 맹주국은 아니더라도 주도 또는 중재를 했으므로 근방에서 나름의 위상과 영향력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애초에 이런 기록들 때문에 연맹설이 주장된 거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삼국사기상으로 3세기 초(209)[* 연대는 4세기 중반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포상팔국의 난]]에 의해 소국 연합의 다굴을 맞아 신라에 헬프를 치는 상황에 몰리게 되고,[* 포상팔국이 공격한 '가라'가 금관국이 아니라 함안 안라국이라는 설도 있다. 나무위키의 포상팔국의 난 문서도 공격당한 대상을 안라국으로 본 시점에서 서술되었다. 애초에 기록 자체가 모호해서 정설이랄 게 없고 저명한 고대사 학자들도 각자 주장하는 바가 갈린다.] 신라에서 [[석우로]], 물계자(勿稽子)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 한숨 돌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이후 가야세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이리저리 외교적으로 끌려다녔다고 추정한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 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209년)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 王子爲質 >17년(212년) 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본기, 내해 이사금 하지만 최근 대성동 고분군에서 [[모용선비]]가 중국에 세운 삼연([[전연]], [[후연]], [[북연]]) 계통의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삼연 - 금관국 - 왜를 잇는 해상 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보여서 그렇게 끌려다니는 위치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된 대성동 88호, 91호의 시기는 4세기 중반이며, 대성동의 주부곽식 대형 목곽묘인 1호가 최후로 축조된 5세기 초까지 금관국은 가야 연맹체 중 가장 규모가 컸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료는 위의 삼국사기 기사와 배치되는 면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또한 최근 들어 삼국사기 물계자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여기 써 있는 '아라(阿羅)'가 '가라'의 오기가 아닌 [[안라국]]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어, 이때 금관국이 포상팔국 연합의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의문점이 찍히는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사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모든 가야국이 금관국인 것처럼 여러 차례 착각해 서술되고 있다는 중요한 지적이 있다. 그래서 532년 가야가 신라에 항복했다고 나오는데, 562년 (대)가야가 또 망하니까 [[신라본기]]의 편찬자는 '아, 가야가 항복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또 멸망당했구나.' 생각하고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서 멸망시켰다."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가라반叛이 [[반파국]]의 멸망이 562년 이전에 일어났고 그 반란을 진압한 것인지, 후대 기록 정리 과정에서 그렇게 정리된 것인지는 기록 그 자체만 놓고서는 알 수 없다. 일본서기 역시 560년 멸망설과 562년 멸망설을 동시에 적시하므로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열전과 지리지에는 그렇지 않고 해당 소국의 이름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포상팔국 전쟁에서 활약한 물계자를 다루는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포상 8국의 공격받은 주체를 '안라'라고 적었다.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 (중략) …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그때(209년?) [[포상팔국의 난|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함께 꾀하자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여 드디어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중략) … 그 후 3년이 지나(212년?)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여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 《[[삼국사기]]》, 물계자전 즉,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편찬자는 다른 가야 소국의 활동을 모두 '가야'로 치환하였다는 지적에서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포상팔국이 공격한 주체는 '안라', 즉 함안의 '아라가야' 임을 알 수 있다.[* 포상팔국과 관련한 논문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일어난 시기와 피해 국가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고고학의 양상과 기록의 괴리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성동 88호분, 91호분의 존재에서 알다시피 금관 가야가 4세기 무렵에는 시종일관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으므로 4세기 중반에 포상팔국의 공격으로 타격을 받은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이후 고구려군에 의해 패퇴함으로써 금관 가야는 다른 가야 국가들과는 달리 고총이 등장하지 않고, 토기 양식의 특색도 많이 쇠퇴하여 신라 토기의 영향이 강력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세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금관 가야의 강력한 축이었던 부산 동래 지역의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급작스러운 신라화가 진행된 것도 이를 방증한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지국|비자발]]·[[금관국|남가라]]·녹국·[[안라국|안라]]·다라·[[탁순국|탁순]]·[[반파국|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 진구 황후 한편 [[일본서기]] 신공기의 위 기사를 한국 학계에서는 '[[이주갑인상]]'+'주체교체론'으로 해석해 [[백제]]의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권을 평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 나라 중 금관국의 다른 이름인 '남가라'도 등장한다.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에서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내지는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 [[천관우]]를 시작으로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 측 사학자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의 주도권자를 근초고왕으로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 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 즉 '''남쪽'''의 오랑캐라고 나온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곱 나라를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가야권도 직접적으로 정복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제압한 경우는 위와 같이 같은 기록의 다른 부분에서 '도륙'이라는 강한 어조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백제의 명목상의 패권 아래 들었다는 것.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193&cid=46620&categoryId=46620|#]] 물론 서해안에 항구가 없는 가야는 중국 본토와 원활하게 왔다갔다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정도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볼 여지가 있다.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래 설명될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야가 백제, 왜군과 협력해 신라를 친 것도 이 시기 백제의 패권에 가야가 동참한 연장. 사실 백제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 가야를 대상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의 실상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마한]]의 잔여세력에 '도륙'이라는 표현을 쓴 것과 달리 가야에는 '평정(平定)'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도 의미일 뿐 그들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거나 지배세력의 교체를 단행하는 등 극단적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고 이후 전개되는 기록이나 고고학을 봐도 가야 세력의 기반은 거의 그대로 온존했고 이후 오랫동안 연합군사작전을 펼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사실 당시 백제에게 필요했던 것은 북방 고구려와의 결전과 거기 앞서 필요한 후방의 안정이었으므로[* 훗날 비슷한 이유로 발생한 사건으로는 [[병자호란]]이 있다.] 남부지방에 지나치게 진을 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이 낙동강 평정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백제의 장수가 [[목라근자]]인데, 목라근자는 이 때 신라 여인 사이에서 [[목만치]]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목만치는 아버지의 군공을 바탕으로 임나(가야)에서 벼슬을 하다가 백제로 돌아갔다고 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백제가 일을 벌였고 이후로도 최소한 2대에 걸쳐 목씨 집안이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두었음은 맞는 듯.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382년 백제와 협력관계에 있던 왜인 [[사지비궤]]의 가라 공격 사건에서 거의 금관국이 잠깐 멸망하다시피했다가 백제 장수 [[목라근자]]의 구원으로 다시 살아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금관국의 왕실을 흔들어 놓은 사건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이에 따르면 일본서기 상 262년([[이주갑인상]]으로 382년으로 본다면) 사지비궤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뜬금없이 금관국 왕실을 몰아내 백제의 [[목라근자]]가 복권 시켜주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아들 목협만치(=목만치?)가 개로왕 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라근자의 활동시기를 382년이 아니라 442년으로 보게 된다면 이 시기 일이라고 볼 수 없다.(이근우[2012], <고대의 낙동강 하구와 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