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관국 (문단 편집) ===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위기) === 399년에는 신라가 국경에 왜군이 들어차 있다고 하여 [[광개토대왕]]의 5만 원군을 불러 왔는데, 이때 도주하는 왜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고 하였고 400년 광개토 대왕이 이를 쓸어버리면서 전쟁터가 된 '임나가라', 즉 금관국이 휘청거리고 결국 반파국(대가야)에 맹주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고고학적으로도 김해 지방 무덤의 부장품이 물론 고고학 특성상 400년 시점이라고 집어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이쯤 20년을 전후한 시기에 크게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라[* [[대성동 고분군]]을 보면 이쯤부터 초대형급 무덤과 별도의 딸린덧널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최대규모가 줄어들며 부장품도 전성기의 금동제장식마구와 왜계 위세품이 더이상 부장되지 않는다.] 이런 통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김해 금관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세력이 일시적이지만 오히려 김해보다 위세가 더 커질 정도였다.[* 김해보다 부산지역 세력이 더 커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금관국의 주체가 부산 복천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내부 부장품이 김해계에서 신라계로 빠르게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잠깐 반짝했을 수는 있지만 금방 신라화되고 이후 부산권역 안에서 인근 [[연산동(부산)|연산동]]으로 묘역이 옮겨간 뒤 고분의 크기가 작아지고 쇠퇴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남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대립 중이다. * 직접 김해를 공격해 김해가 크게 쇠퇴하고 주변 가야와 일본으로 대거 도피했다.[* 일본으로 금관국 유민이 퍼져나갔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이 시기부터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은 스에키토키가 생산되기 시작하며(단 최근 견해는 스에키 토키가 4세기 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경남 지역의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국이 이 때 잠깐 멸망하거나 멸망에 가깝게 몰락했다던 설도 있었는데, 5세기 이후에도 대성동 고분군에서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굴이 되기도 해서[[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9170|##]] 일단 국체는 보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성동 거대 목곽묘 축조만 중단됐을 뿐 그 외의 고분군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 피해를 입긴 했지만 쇠퇴하지 않았다. * 혹은 광개토왕릉비의 '종발성'을 낙동강 동쪽의 한 거점 정도로 보아 아예 가야 지역까지 오지도 않았거나 가야지역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고구려 계열의 유물이 김해에 전혀 침투하지 않았다는 점, 김해의 특이적 묘제와 토기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점 등이 있다.] * 종발성조차도 순순히 항복했고 큰 싸움은 없었을 것이다. * 애초에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광개토왕이 공격한 '가라'가 김해 금관국이 아니라 고령 대가야였다. [[부산대학교]] 신경철과 [[경북대학교]] 주보돈이 이 부분에서 이설을 세우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위시한 금관가야의 성장과정 및 남한 지역 삼국시대의 물질문화 전개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마구(馬具)라는 기승용 마구 문화의 등장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그러한 전개 과정의 주요한 획기적 사건으로 광개토대왕의 400년 남정이 거론되었던 탓에 아래와 같은 논쟁이 촉발되기도 하였다. 마구의 사용이라던지 4~5세기 금관가야의 성장과 신라와의 대립과 우열 등의 문제는 분명 주요한 현상이지만 부산대 쪽의 주장에서 마구의 시작이 광개토대왕의 400년 남정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마구들이 400년 즉, 5세기 1/4분기에 맞춰지게됨에 따라 다른 유물, 유적들의 시간들도 조정되게 되었고 이에 거센 반론을 받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가야사, 초기 신라사의 관점에서도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를 중시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400년의 사건을 유의미하다/그렇게까지는 아니다로 구분하는 것이 그에 맞물린 유물들의 변화, 편년관의 변화 등으로 인해 역사, 고고학적 해석 전반이 갈리게 된다. [[가야]] 문서에서 서술된 [[주보돈]]과 신경철의 대립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부산대의 연대관이나 특히 동북아시아의 거국적인 교차 편년 등의 연구 등은 학계를 분명히 건강한 토론으로 활발하게 한 것은 맞지만 저 400년의 획기, 즉 광개토대왕의 남정을 지나치게 고수하기 때문에 이와 결부된 유물의 연구자나 다른 삼국시대 국가를 주제로한 고고학 연구자들에게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관한 역사고고학적인 논쟁을 다루는 아래의 광개토 대왕의 남정의 영향력 여부 문단에서는 부산대 측의 견해와 소위 '경북' 지역의 연대관, 즉 경북대나 영남대 측의 견해[* 사실 부산대냐 아니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로 나뉘어져 있다. 경북 쪽 연대를 취하면 신라 - 가야는 물론 백제 지역과도 자연스럽게 연대가 서로 합치되며, 대국적으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연대관이 서로 부합되는 결과가 산출된다. 그런데 부산 쪽 연구를 취신하면 유물 간의 교차 연대에서 '유독 한국만' 50년 ~ 60년 뒤쳐지는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고 아래 내용을 읽어나가도록 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