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예수와 이스라엘 ==== >역사상 예수가 과연 교회를 세웠더냐는 물음이 비평 신학에서 세차게 일어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점차 뚜렷이 인식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문제 제기 자체에 잘못이 있습니다. 꼬집어 말하건대, 예수는 애당초 교회를 세울 수도 없었으니, 오래 전부터 교회가, 사실인즉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모아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말하면, 예수에 의해 모여지고 예수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하느님 백성의 삶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말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 >이렇게 볼 때, 역사상 예수에게서 무슨 정식의 교회 창설 행위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물론, 예수가 이스라엘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으며 참 이스라앨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했더냐를 묻는다는 것은 더없이 뜻있는 일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2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5쪽 상술했듯이, 예수는 1세기 유다인이지 현대적인 종교적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문화사의 맥락에서 보든, 성경 텍스트 그 자체에서 보든, 예수에게 있어서 삶은 온통 '종말론적 이스라엘'{{{-2 (=교회)}}}을[* '교회'{{{-2 ''ekklēsia''}}}는 1세대 예루살렘 공동체가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었다가,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로 확산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수가 '교회'라는 단어를 직접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세대 예루살렘 공동체가 '교회'{{{-2 ''ekklēsia''}}}와 '예수의 이스라엘'을 분리된 공동체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향해 정향되어 있다. 분명히 예수의 가르침은 민족의 벽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개방성을 갖추고 있지만,[* 바울로 친서 뿐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처럼 유다계의 교회의 맥락에서 나온 텍스트에서도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이방인 입교 여부 문제는 바울로 이전에 이미 베드로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결론이 난 논쟁이다. 바울로 시대의 논쟁은 어디까지나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도 유다인이 되어야 하는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2등급 신자인가?"라는 문제였으며, 이미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되는 논쟁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뿌리를 갖춘 개방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개인들의 산술적 집합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동체를 전제한 개방성이다. "예수가 자신의 교회상을 특징짓기 의하여 사용한 성서의 보고들과 비유들은, 그가 매우 구체적인 교회상을 가졌고 사도들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아우구스트 프란츤{{{-2 ''August Franzen''}}}, 《세계교회사》{{{-2 ''Kleine Kirchengeschichte''}}}, 최석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1, 21쪽] >예수의 관심은 개인의 총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다. ... 중요한 관심사인즉 어떤 임의의 집결운동과 각성운동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세말 모임이다. 예수 설교의 중심 내용인즉 바야흐로 예수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때가 성취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세말을 위한 옛 약속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다. 이 세말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제시된 구원을 붙들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이다. >... 예수의 윤리는 엄밀히 바로 이런 의미에서 쇄신된 세말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인이라는 처지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적 차원이 표출되고 생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2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127-129쪽 >예수가 관계하는 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는 자기네 역사를 지닌 이 백성 앞에 나타난다. 이 백성을 상대로 활동한다. 이 사정이 예수의 활동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예수 자신이 이 백성의 일원인 이스라엘 사람이요, 모국어를 말하며, 성서의 언어에서 취한 청중에게 익숙한 표상과 동기 들을 자기 선포에 사용한다.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백성을 앞에 두고 이 백성에게 자기가 보냄받았다고 의식했으며 이 백성을 자기 제자들의 협력으로 임박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런 집단적 현상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까닭이란 없었다. 아니,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 소임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사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 활동의 이 정향을 삭감 없이 인정할 때라야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갈릴래아의 예수 청중 가운데 이방인도 있었다는 사실이 종종 적시되어 있다 해서 이 정향이 원칙적으로 달라지는 바는 조금도 없다. 물론 예수의 청중 속에 그런 이방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있다. '''이스라엘이 ― 꼬집어 표현하자면 ― 예수의 "엑클레시아"{{{-2 ἐκκλησία(교회)}}}였으며, 새로이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불려 들어와야 할 백성이었다.''' 여기서 "엑클레시아"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다름없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을 뜻한다.[* (책 속 주석) 그리스어 성서 번역에서 이스라엘이 자주 "엑클레시아", "주님의 엑클레시아" 등으로 일컬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명 23,1.2; 판관 20,2; 3열왕 8,14.22.55; 1역대 13,2 등. 히브리어 해당어는 대개 "카할"이다.]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공간적으로 이스라엘 땅과 계속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알려진다. 요르단 동쪽의 헬레니즘화한 열 도시 지역인 데카폴리스가 언급되기는 하지만{{{-2 (마르 4,20; 7,31; 마태 4,25)}}},[* (책 속 주석) 스키토폴리스만이 요르단 서쪽에 있었는데, 역시 열 도시에 꼽혔다.] 그리고 마르코 7,24 이하 // 마태오 14.21 이하에 따르면 예수는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넘어가고(루가는 삭제한다) 마르코 8,27 // 마태오 16,13에 따르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부근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2 (루가 9,18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일이 없이 예수의 혼자 계심을 말한다)}}}, 아무튼 이방인 가운데서 일어난 전도 활동을 말하는 바는 없다. 띠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상황이 어떠했다고 할 수 있든간에, 그 지리적 소여는 정작 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 여행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준{{{-2 (마르 7,26//)}}}, 더욱이 예외로 특징지어진{{{-2 (마르 7,27-30//)}}} 여행에서 추론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회상으로서 북부 여행에서 선교사업이 성립될 수는 없었다면, 여기서는 분봉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쪽의 일시적 추적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겠다{{{-2 (참조: 루가 13,31-32)}}} >----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2002, 256-257쪽 가령 산상설교를 읽을 때 구체적인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사해동포 사상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텍스트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실상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동체에게 하는 말이다. ||<-2> ^^3^^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4^^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5^^μακάριοι οἱ πραεῖς, ὅτι αὐτοὶ κληρονομήσουσιν τὴν γῆν. ^^6^^μακάριοι οἱ πεινῶντες καὶ διψῶντες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ὅτι αὐτοὶ χορτασθήσονται. ^^7^^μακάριοι οἱ ἐλεήμονες, ὅτι αὐτοὶ ἐλεηθήσονται. ^^8^^μακάριοι οἱ 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 ὅτι αὐτοὶ τὸν θεὸν ὄψονται. ^^9^^μακάριοι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ὅτι αὐτοὶ υἱοὶ θεοῦ κληθήσονται. ^^10^^μακάριοι οἱ δεδιωγμένοι ἕνεκεν δικαιοσύνης,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11^^μακάριοί ἐστε ὅταν ὀνειδίσωσιν ὑμᾶς καὶ διώξωσιν καὶ εἴπωσιν πᾶν πονηρὸν καθ’ ὑμῶν [ψευδόμενοι] ἕνεκεν ἐμοῦ. || ||{{{[}}}가톨릭 새번역{{{]}}}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개신교 새번역{{{]}}} ^^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2> 마태오 5장 3-11절 || 산상설교의 이 말을, 보편 인류 중에서 마음이 가난한[* 직역: '영(靈)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의미로 읽으면 해석이 아예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산상설교를 듣고있는 종말론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하늘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며, 교회가 슬퍼한다면 위로를 받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또한 산상설교 말고도, 예수가 30대의 나이로 독신이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실상 예수에게 있어서 아내란, 이스라엘' 혹은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예수 스스로가 부부나 혼인과 연관된 가르침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즉 이스라엘에게로 정향된 자신의 삶을 독신을 통해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전권주장과 근본적인 그리스도론을 보인 것이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 (책 속 주석)참조: 호세 1~3장; 이사 62,5; 에제 26장 그리고 시편 45에 관한 타르굼의 독서는 이 시편을 하느님과 그의 신부인 시나고구에 적용시키고 있다.] >----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병행구: 마르 2,19-20; 루카 5,34-35] >----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병행구: 루카 14,15-24] >----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