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독교 (문단 편집) ==== 예수는 메시아 자의식을 가졌는가? ==== 물론 예수가 실제로 스스로를 메시아 및 종말론적 인자(사람의 아들)로서 명시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도 있다. 일단 이른 공관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스스로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다.{{{마르 8,30)}}} 이를 주석학에서는 '메시아 비밀'이라 하는데, '메시아 비밀'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메시아라 말하진 않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 외의 사례 (Bousset, 1913): 예수가 3인칭으로 언급하는 '인자의 도래'[* 역사적 어록으로 추정되는 마태오 10:32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나'로 지칭하는 것과 비교할 때 차이가 두드러진다.]; 지나치게 교의적인 구절들[* 마태오 16의 교의적 심문 (마르코 8:27, 9:1, 및 루가 9:27 간의 비교); 마르코 10:45 (루가 22:27과의 비교)]; 후대의 개작 및 삽입으로 의심되는 구절들[* 마태오 8:20, 10:23 (이 구절은 교회가 유다인에 한정되어 있었던 극초기 예수 숭배의 반영이다), 11:19, 12:39-41 (마르코 8:12와의 비교; 요나의 표적과 인자 교의 간의 연결); 13:37, 13:41, 18:11, 19:10, 24:27, 24:37, 24:39, 25:31, 마르코 2:10, 2:28, 8:31, 8:38b, 9:9, 9:12b, 9:31, 10:33, 13:26, 13:29, 13:35 (마태오 24:44-루가 12:40이 원본이다), 14:21, 14:41, 14:62, 16:8, 루가 6:22 (마태오 5:11 간의 비교), 7:34, 9:26 (마태오 16:27 간의 비교), 9:58, 11:29-30 (막 8:12), 12:8, 12:10 (마르코 3:28과의 비교), 17:22 (17:23 이후 덧붙임), 17:23, 17:26, 17:30, 18:8b, 24:7]; 역사적 전승이 빈약한 구절들[* 루가 21:36과 22:48] ; '인자'(''바르 에나샤'')는 본래 '사람'이라는 메시아(!)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단어의 오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세트는 이 용어의 메시아적 사용 설명될 수 있음을 해명했다. Bousset, 《퀴리오스 크리스토스(상)》 (1913; Trans. 진규선)];'인자' 칭호는 아람어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헬라어의 오역에서만 발견된다.[* Lietzmann, ''Der Menschensohn'' (1896). Eerdmans, ''Tijdschr'' (1894).]). 당연히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령 루돌프 슈낙켄부르크{{{-2 Rudolf Schnackenburg}}}는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메시아 고백뿐만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서도 '비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는 "예수의 금지 명령이 어떻게 무시되는지 묘사"한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같은 책 132쪽.]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그렇다면 최소한 치유 사회에 있어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메시아 비밀의 초점은 함구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함구령으로 드러나는 은밀한 발현에 있다"는[*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2-133쪽.]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의 이 예시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직접적인 비밀 요청이 아니라 치유 사화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 이야기를 접근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가령 마르 14,61에서는 대사제가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묻는데, 마르코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간다면 1. 예수가 메시아라는 세간의 평을 적대자가 들었거나 2. 예수의 행적으로부터 "자칭 메시아"라는 의혹을 적대자가 도출했거나 이지, 소위 [[상상도 못한 정체]]라는 게 아니다. 또한 치유 사화가 아니라 베드로의 직접적인 메시아 고백에 대해서는 슈낙켄부르크는 다음을 지적한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마르코의 예수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이 메시아 칭호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이 메시아를 현세의 정치적 통치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해방자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이 개념을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 했다. ……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를 군중의 생각과는 달리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렇게 그의 고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이 고백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가 끝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그 고백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 후반부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이 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 보여 주기 시작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하고 죽어야 하는 '사람의 아들'의 비밀을 알려 주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 함구령 배후에는 예수의 비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밝혀 줄 사람의 아들에 관한 사고가 배태되어 있다. >----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1807&setMode=pc|《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134쪽. >예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비록) 은폐된 방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분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기 이 주장을 내세웠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라는 것도 밝혀 주었다. >---- >-루돌프 슈낙켄부르크, 《''Règne et Royaume de Dieu''》(R. Marlè 번역), Paris 1965, p.100[* 샤를르 페로,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12476|《예수와 역사》]], 박상래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12 개정 1판), 297쪽에 인용된 것을 발췌함.] 또한 '메시아'라는 말을 예수가 명시적으로 발설하진 않았을지라도,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안젤로 아마토{{{-2 Angelo Amato}}}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예수는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이 호칭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불릴 뿐이다. 단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호칭을 수용한 적은 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그밖에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이 호칭을 인정하지만,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한 베드로의 고백{{{-2 (마르 8,27-33 병행)}}}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책 속 주석)참조: I. De La Potterie, "La confessione messianica di Pietro in Mc 8,27-[math({33}^{n})], in ''II Messianismo', Atti della XVIII settimana biblica dell'ABI, Paidia, Brescia 1966, pp. 59-77; R. Pesch, "Das Messiabekenntnis des Petrus(Mk 8,27-30). Neuverhandlung einer alten Frange", in ''Biblische Zeitschrif'' 17(1973), pp. 178-195; 18(1974), pp. 20-31]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2 (마르 8,29)}}} 예수는 이 호칭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해방가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메시아는 고통을 당해야만 하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2 (마르 8,31)}}}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런 의미로의 메시아가 아니라 {{{-2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의 수난예고 직후 고난 받는 메시아를 반박함: 마르 8,32)}}}, 하느님의 뜻에 따른 메시아였다. >두 번째는 대사제가 예수에게 신원을 물을 때다. "'당신은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2 (마르 14,61.62)}}} 이 일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소송과정 중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선언할 적절한 시간에 잘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학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마르코 복음사가의 편집도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받으셔야 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묘사하는 표현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제의 질문형식은 목격증언을 동반한, 대사제가 직접 발설한 말{{{-2 (ipsissima vox)}}}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책 속 주석)참조: K. Schubert, ''Jésus à la lumière du Judaisme du premier siècle'', Cerf, Paris 1974, p. 157] 여기서 예수가 왜 정치적 함축성이 들어있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수는 당시 무력한 상황에서 소송에 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인정한 메시아의 의미는 정치적 승리자인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종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3772|《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math({ }^{2})]2014), 318-319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는 예수가 친히 메시아라고 말한 바는 없지만, 예수의 사명의식이 메시아라는 주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직접적인 발설은 없었으나, 예수는 메시아 사명의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참고: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3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