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마궁수 (문단 편집) === [[일본]] ===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 이전의 [[사무라이]]들은 자주 [[말(동물)|말]]을 타고 [[활]]로써 전투를 벌이곤 했는데, 이들은 길이 2.2m가 넘는 [[일본]]식 [[장궁]]을 사용했다. 전국시대에는 [[손자병법]]의 [[풍림화산]]을 적극 차용한 걸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의 사례처럼 기마로 이동 후 내려서 싸웠던 "기마보병"의 형태로도 기병을 운용했으나, 이는 전국시대 특유의 운용법이었다. 일본식 장궁인 [[화궁]](和弓)은 독특하게도 아랫장이 짧은 비대칭형 구조인데, 이에 관해서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흔히 알려져있듯 장궁으로도 말 위에서 활을 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습한 자연환경 탓에 [[각궁]]과 같은 고도의 복합궁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목궁의 재료적 한계를 크기를 키우는 식으로 해결하던 중 나온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비록 일본도 5세기에는 단일궁을 벗어나 복수 목재를 결합한 복합궁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되었으나, 더 다채로운 소재를 쓸 수 있던 여타 지역보다는 성과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각궁 덕에 140m 유효사거리를 가진 한반도의 활에 비해 '''고작 25m 남짓되는 유효사거리를 늘리려고 2.2m로 크게 만들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윗장이 길어졌다.''' 나무만 가지고 장력을 확보하려니 궁수 본인의 키보다도 큰 활을 만들었고, 그 결과 지면이라는 한계 탓에 아랫장을 최대치로 만들고도 부족하여 윗장으로 더 확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당장 장력을 확보하더라도 탄성의 불균형 탓에, 시위를 당긴상태까지는 균형을 잡을 수 있더라도 쏘는 순간 균형이 흐트러져 힘이 분산되어버렸다.[* 전근대 내내 일본에서도 활과 투석을 비롯한 원거리 무기 비중이 늘 컸으나, 이러한 원거리 사격 수단의 기술적 제한 탓에 전국시대 일본은 일본 소녀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팔아치워서라도 조총과 화약을 빨리 단번에 더 많이 수입하려는 군비 경쟁에 혈안이었다. 일본의 백성이 팔려나가는 노예무역이 워낙 극심해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지령까지 내려야할 정도. 물론 인신매매 자체를 금지한 게 아니라 이제 일본인 말고 외국인만 납치해서 팔아버려라는 소리였지만, 이런 법령 또한 회피하려고 동남아를 시작해서 20세기 초까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해외 매춘굴에 일본 소녀 [[가라유키상]]을 보내 포주짓을 해서 각종 전쟁자금과 나라 발전기금을 강제로 벌어들이게 했다. [[메이지 유신]] 기간으로만 한정하더라도 이렇게 희생된 일본 소녀만 30만 명이 되었으나, 그만큼 벌어들인 외화도 어마어마한지 일본의 위정자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1만엔 최고액권에 실리는 유신지사들마저 가라유키상이라는 속된 말보다 "죠시군(낭자군)"이라 부르면서 '''국가기간 사업으로 칭송했다.''' 참고로 가라유키상을 유행시킨 장본인은 중국인 왜구 두목 [[왕직]] 휘하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 조기 도입 사업의 자금줄을 찾던 [[오다 노부나가]]였다.] 현재는 기예의 형태인 [[야부사메]]로 그 전통이 남아 있다. [[신사(신토)|신사]]에서 매년 예대제를 지낼 때마다 치르는 필수요소가 되어 [[일본]] 각지에서 시연되고 있다. 그러나 야부사메 자체가 일종의 제례의식같은 형태로 전승되고 있기에 여러나라의 마상궁술들에 비하면 실전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