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마궁수 (문단 편집) === 쇠퇴 === 기마궁사의 쇠퇴는 몇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다. 1차는 성벽과 같은 방어구조물의 발달이었으며, 2차는 쇠뇌와 같은 보병화력의 증강이었고, 최종적으로는 [[화승총]]을 시작으로 총기의 시대가 열리면서였다. 그 이전에는 기마궁사라는 존재가 단 수십 기만 있어도 상대방은 보병연대, 중기병 수십기, 성곽 방어물 같은 엄청난 경제적인 지출과 사회적인 보안망을 강요받아야 했다. 아니면, 똑같이 기마궁사를 육성하거나. 기마궁술은 궁극적으로 [[총포]]의 발달에 밀려 점점 쇠퇴하였다. 보병은 물론 기병조차 총을 중심으로 무장이 통일되어갔고, 전술도 [[테르시오]]를 거쳐 [[전열보병]]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궁기병은 조밀하게 구성된 보병들의 가공할 화력 앞에서 녹아내리기 십상이었다. 특히 서유럽의 경우, 기마궁술 자체가 유목민족과 밀접한 반면 지리적으로 그들과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고대 시절부터 기마궁술의 전통이 없다시피 했고, 중세 때 이미 보병조차 활 자체를 잘 안 쓰기 시작하여 거의 사장되었다. 그나마 [[웨일스]] 산악지대의 장궁 문화를 접한 영국이나 바다 건너 합성궁을 써대는 [[동로마 제국]], [[레반트]], [[투르크]] 등과 교류하던 이탈리아 등에서는 소수 기마궁수 부대를 편제한 적은 있지만 대규모는 아니었다. 보병이든 기병이든 주로 쇠뇌와 창을 썼기에 화기 도입 후에는 쇠뇌의 지분을 총이 빠르게 차지하였고, [[총검]] 발명 후에는 창조차 도태되었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조차 총을 접한 후로는 활보다 총을 선호하며 기마총병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기마궁수는 19세기까지 실존했다. [[청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도 기강이 해이해진 팔기군을 어떻게든 유지하면서 이들에게 기마궁술을 훈련하도록 했으며,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도 총의 보조로 활을 사용했다. 심지어 서유럽에서도 19세기 초에 기마궁수들이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전쟁]] 때 [[러시아 제국]]의 [[바시키르인]] 경기병들이 대표적이다. 유럽인 화가들은 바시키르인 궁기병들을 매우 이국적인 존재로 보고 이들 관련한 그림을 적잖이 남겼다. 다만 궁기병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시기는 한참 지난 까닭에 바시키르 경기병들의 역할은 정찰, 패잔병 추격에 국한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살다보니 전쟁에 신민을 동원하다보면 이렇게 구시대적 병력이 소집되기도 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십자군의 후예로 알려진 [[조지아]] 산골 부족에서 '''[[쇄자갑]]을 차려입고 칼과 방패, [[머스킷]]을 쥔 전사들'''이 참전하기도 했다. [[http://www.batsav.com/pages/crusaders.htm|#조지아 산악부족들: KHEVSURS]]] 활이라는 무기가 총이라는 더 우월한 무기로 대체되면서 궁병과 동시에 기마궁수도 몰락했지만, 말 위에 탄 채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병종이라는 개념은 [[총기병]](Carabineer)과 [[용기병]](Dragoon)으로 계승되어 한동안 남았다. 이후 총기병과 용기병도 전통적인 기병 자체가 도태되자 이들도 [[기갑]]이나 [[항공]] [[수색대]], [[기계화보병]] 등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에는 [[헬기]]와 [[전차]], [[장갑차]]를 타고 다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