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미가요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나왔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와카집(古今和歌集)'[* 와카란 일본 고유 시가 형식의 하나로 한국으로 치면 향가나 시조에 해당한다. 기미가요는 이러한 와카 1천111수를 모은 고금 와카집에서의 343번째 노래이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462618|#]]]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써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ruby(君, ruby=きみ)]が[ruby(代, ruby=よ)]は(기미가요와)'로 시작되는 현재의 형태와 달리 '我が君は(와가기미와)'라는 가사로 시작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78쪽]]] 이 첫 가사는 [[가마쿠라 시대]]에 변경되었으며, 나머지 가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미가요는 [[생일]]과 같은 공적인 행사에 불려졌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악보가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Kimigayo#History|"The first lyrics were changed during the Kamakura period, while the rest of the lyrics stayed the same. Because the lyrics were sung on formal occasions, such as birthdays, there was no sheet music for it until the 19th century."]]] 기미가요는 [[가마쿠라 시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축제곡으로 쓰이다가 [[에도 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오오쿠[* [[에도 성]]의 혼마루 구역에서 [[쇼군]]의 처첩, 생모, 자녀 및 시녀들이 거처하던 곳이다.]와 사쓰마한[* 지금의 [[가고시마현]].]에서 평범한 명절 노래로 사용되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당시 '기미'는 [[천황]]이 아니라 [[에도 막부]]의 지배층인 도쿠가와 쇼군, 사쓰마 한의 지배층로서의 시마즈 가문, 귀빈 또는 축제 참여자들을 의미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기미가요가 일본 제국의 국가로 채택된 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할 때까지 기미가요는 일본의 주권자인 천황의 긴 재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천황은 더 이상 신의 권리로 나라를 통치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인 인간이 되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FrwMHKDPUzQC&q=kimigayo&pg=PA126&redir_esc=y#v=snippet&q=kimigayo&f=false|Citizenship Education and Lifelong Learning: Power and Place, 126쪽]]]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wZHsKd8HX8o)]}}} || || '''존 윌리엄 펜튼의 기미가요''' || [[메이지 시대]]인 [[1869년]],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 국가로 거듭나고 있을 때까지 [[국가(노래)|국가]](國歌)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었다. 같은 해 [[요코하마시|요코하마]]에서 근무했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영국군 군악대 지휘자인 존 윌리엄 펜튼은 이렇듯 일본에 국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가사만 제공한다면 자신이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일본, 중국 역사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가고시마현]]의 포병 대위인 오야마 이와오에게 국가를 위한 적절한 가사를 선택해 달라고 요청해 가사를 붙였고 작곡에 2~3주, 리허설에 불과 며칠의 시간이 주어진 펜튼은 [[1870년]] 천황 앞에 국가를 선보였다. 이것이 첫 번째 '기미가요'이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 내에 작곡된 이 첫 번째 기미가요는 장엄함이 부족함과 동시에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작곡가의 한계로 부르기가 어려워 이후 수정을 하게 되었다.[* [[https://www.mk.co.kr/premium/behind-story/view/2014/01/4421/|우리가 몰랐던 각국 國歌에 숨은 얘기]] [[https://www.japantimes.co.jp/news/1999/08/05/national/identity-of-kimigayo-composer-remains-mystery/|hIdentity of 'Kimigayo' composer remains mystery]]] 위 영상에서 연주되는 펜튼이 작곡한 버전은 현재도 여전히 매년 펜튼이 군악대장으로 활동했던 요코하마의 묘코지 사원에서 공연된다. 이후 [[1876년]] 해군 군악대 지휘자 나카무라 수케츠네는 해군에 음악을 바꾸기 위한 제안서를 제출했고, 그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멜로디는 황실 정원에서 연주되던 곡에서 사용되었던 형식을 반영하기로 했다. 이후 제안서를 제출했던 나카무라 수케츠네와 육군 군악대 지휘자였던 오츠모토 오시토요 등이 주도해 [[독일]]의 작곡가인 [[프란츠 에케르트]][* [[대한제국]]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도 담당했다.]에게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하게 된다. 프란츠 에게르트는 당시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 아악과 직원인 하야시 히로모리(林廣守)가 붙인 선율을 완성시켜 기미가요를 작곡하였고, 이 기미가요는 [[1880년]] [[11월 3일]] [[메이지 덴노]]의 생일에 황궁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기미가요'의 시초이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95100021&ctcd=C09|일본서 버려진 기미가요 작곡가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https://www.mk.co.kr/premium/behind-story/view/2014/01/4421/|우리가 몰랐던 각국 國歌에 숨은 얘기]]] 일본 제국 정부는 [[1888년]] 에케르트의 기미가요를 공식적으로 국가로 채택했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1904년]] 오사카 신문에서는 기미가요가 일본 국가 전체가 아닌 일본 황실을 위한 노래라는 의견이 등장했고,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칸조는 20세기 초 '기미가요는 천황을 찬양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일본의 국가가 아니라고 밝혔다. 칸조는 나라의 국가는 신성한 천황의 감정이 아니라 민중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막상 당시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축하 행사가 급증하기 전까지 기미가요라는 국가에 친숙하지 못했는데, 신문들은 기미가요를 해외에서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다른 일본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r8IDxzZ4SQIC&q=kimigayo&pg=PA36&redir_esc=y#v=snippet&q=kimigayo&f=false|State Making in Asia, 36쪽]] [[https://books.google.co.kr/books?id=73sE6NkXPbAC&q=Japanese+flag+homes&pg=PA81&redir_esc=y#v=onepage&q=Japanese%20flag%20homes&f=false|Case Studies on Human Rights in Japan(1996), 79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일본 본국과 식민지의 학생들이 매일 아침 기미가요를 부르며 [[쇼와 덴노]]에게 경례를 하도록 하였는데, 동시기 [[일제강점기]]였던 조선 또한 이러한 기미가요 제창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노인들 중 일부가 지금까지도 기미가요를 쉽게 부르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0|도쿄올림픽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 부르면 논란거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TDgOFsH8PZo)]}}} || ||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중 기미가요''' ||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방송협회|NHK]]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천황 폐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발언한 뒤 기미가요가 흘러나오고, 이후 [[쇼와 덴노]]가 전 세계를 향해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무조건 항복 선언]]을 함으로써 전쟁과 일본 제국의 종식을 알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