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생 (문단 편집) == 오해와 실상 == 현대인들에게는 단순히 매춘부처럼 인식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광범위한 개념이었다. 물론 하던 일이나 사회적 지위는 코르티잔, 일본의 유녀 계급과 다를바 없다. 기생의 최하위 계급은 현대의 매춘부이며 중간계급은 [[쩜오]], 최상위 계급은 고급콜걸과 비슷한 일을 했다고 이해하면 빠르다. 인식과 비슷한 기생은 중국의 관기에 가까운데, 중국은 역사적으로도 죄인의 가족들 중 여자는 교방사라는 전문적인 정부조직에서 기생으로 교육시켰다. 연좌제 개념이 있었던 시대기에 당연 그 교육과정은 억압적이었으며 지향점도 매춘부를 넘어 성노예화에 가까웠다. 왕족,[* 현재 재위하는 임금과 8촌 이내여야 한다.] 양반,[* 3대에 걸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가 아무도 없을 경우 평민으로 강등된다.] 중인, 평민, 천민으로 분류되는 조선의 5가지 신분 중에서 기생은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에 해당되었다.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에는 양인 여자가 성매매를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으나 기생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일패기생은 매춘을 거의 하지 않고 이패기생은 음지에서 경우에 따라 하였으며,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은 [[매춘]]을 거의 업으로 삼았다. 매춘을 안하고 멀쩡히 결혼해 남편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인기있는 극소수의 일패나 이패 기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는 유흥과 접객이 중심이였기에 매춘이나 성접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이를 알고 눈감아주었다.[* 후술되어 있지만 공인 매춘부가 아니였다는 것을 오해해서 아예 성관계를 안 맺고 처녀로 남았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대의 연예인과 아이돌들도 틈나면 성접대 논란이 나는 와중 어두운 면은 존재했었다. 기생이 하지 않았다는 매춘은 화대를 받아 성관계를 맺는 일반적인 매춘이였지, 성관계 자체를 안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때문에 기생은 헛점을 이용해 손님의 애첩이나 정부 등 사적으로 사귀는 내연 관계로 가거나 음지에서 매춘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문화권도 법이 지켜지지 않거나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물며 신분제에서 최하위권인 기생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보호받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도 기생은 먼저 외모가 아름다워야 했고 기생 하나를 두고 치정 싸움을 벌였다거나 기생 출신을 모친으로 둔 천민 등 기록이 있어 조선에서도 순수한 예술인이 아닌 음지에서 즐기는 성적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mcode=series&art_id=200510061929521&sec_id=561201|#]] 삼패기생들이 매춘을 업으로 삼은 것도 링크에 나온 것처럼 기생들도 급에 따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한정되었는데 삼패는 일패, 이패 전용 노래와 춤을 못했으니 자연스레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식으로 빠진 것. 즉, 급이나 개인의 형편 등에 따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연예인에서 매춘부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일패 기생들은 그 자체를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한 데다, 왕족이나 [[양반]], 부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일패나 이패 기생들은 현대로 치면 톱 연예인인 만큼 함부로 건드리는 게 부담스러웠으므로, 진짜로 접대만 하고 몸은 팔지 않는 기생이 있었다. 이런 기생은 사실상 양인으로 취급하였으므로, 외국의 [[외교관]]을 접대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고, 은퇴 후에는 기방의 행수[* 현대로 치면 유흥업소의 [[사장]]이다. [[해신(드라마)|해신]], [[주몽(드라마)|주몽]], [[객주(TV 드라마)|객주]], [[황진이(드라마)|황진이]] 같은 상인이나 기생들이 자주 등장하는 사극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행수라는 말 자체가 동양권에서 [[기업]]의 사장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용어였다. 전통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선 기업을 '행'이라 하고, 현대적인 의미의 [[주식회사]]를 [[서양]]식 행이라는 뜻에서 '양행'이라고 불렀는데, [[유한양행]]이 바로 이런 예다. 때문에 기업의 사장을 행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행수라고 부른 것이다.]가 되거나 일반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즉,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접대부 정도로만 이해하면 오산이라는 얘기다.[* 이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소설 [[무정(소설)|무정]]에서 잘 드러난다. 주인공들 중 한 명인 영채가 기생인데도 다른 주인공인 형식과의 재회를 꿈꾸며 순결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비록 형식이 근무하던 학교의 학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지만, 당시 기생들의 정조 의식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드라마 [[황진이(드라마)|황진이]]에서도 주인공 명월([[황진이]])의 첫사랑인 은호 도령이 병으로 사망하자, 명월의 동료 기생들이 행수인 백무의 질책을 받아가면서까지 단체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봐도 알 수 있다.] 기생의 분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일패기생: 오직 임금 면전에만 노래와 춤을 하는 기생이다. 매춘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개인에 따라 유부녀도 존재했다. * 이패기생: 관기와 민기로 나뉘며 관기는 문무백관을 상대하며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하며 노래와 춤을 춘다. 원칙적으로는 매춘을 하지 않지만 음지에서 매춘(내지는 성접대)을 한다. * 삼패기생: 일반 평민을 상대하는 기생으로 노래와 춤, 매춘을 병행한다. 또한 예술에 중점을 두던 기생과 [[매춘]]이 업무이던 [[유녀#s-2]]와는 따로 구분을 하였다. [[성종실록]]에도 유녀의 음란한 짓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도 [[게이샤]]와 [[유녀]]는 철저하게 분간되었는데 게이샤는 매춘을 금지했고 유녀는 공인 매춘부였다. 해외 미디어에서는 고급 유녀인 [[오이란]]과 게이샤를 헷갈려하는 묘사가 많은데 유녀들은 오비(매듭)을 앞으로 맸고 게이샤는 일반 아녀자들처럼 오비를 뒤로 맸으며 복장과 머리 스타일도 유녀들은 매우 화려했다. 게이샤들은 수습 단계인 마이코만 복식이 그나마 화려했고 정식 게이샤가 되면 단순한 화장과 기모노로 철저히 춤과 노래로만 실력을 뽐내야했다. 다만 기생들도 결국 이패와 삼패는 음지에서 매춘을 했었고 일패기생조차 정말 정조를 지키거나 유부녀인 경우는 손도 못댈 정도로 영향력이 매우 큰 소수 한정이였던 것처럼 게이샤도 유녀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음지의 매춘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307010_004|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10일 을사 네 번째 기사]][[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7_0030_0010_0020|출처]] 고급 기생들은 각자 집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다. 일패의 경우 궁궐에도 출입했다. 양반들은 자신의 후원에 따로 부르거나 교외로 나가서 춤과 음악을 즐기거나 학문이나 시, 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양반들조차 어지간한 명망이 있는 게 아니면 일패기생을 쉽게 부를 수 없었다 한다. 주된 고객층은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학문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했을 정도이다. [[삼국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틀이 잡힌 것은 [[고려]]와 [[조선]] 시대인데, 각종 정치 제도와 사교적인 자리에 예인이 동원되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종합 예술인을 양성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재능]], [[성격]], [[인성|인격의 고매함]]까지 육성하는 엄격한 교육을 관장했다.[[http://web.archive.org/web/20190815174910/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2&content_id=cp042800020001&search_left_menu=1|출처]] 일단 기예가 뛰어난 기생이라면 신분이 천민이라도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 아무리 삼패기생이어도 일단 낮은 수준의 기예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며, 이들조차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삼패라도 만나려면 돈이 꽤 필요했다. 조선시대의 [[매춘부|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다. 기생이 창녀인 것이 아니라 창녀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의 구분이 무의미한 경우도 좀 있었다. 삼패기생은 기생인데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성접대를 하거나, [[성매매]]를 해서 돈을 벌었다. 이런 기생을 [[창녀|창기]](娼技)라 하여, 사회적으로는 일반적인 기생과는 달리 진짜로 [[천민]] 대접을 하였으며, 당연히 노골적으로 차별받았다. 그리고 창녀들 중에 퇴물로 전락한 기생들이 유입되는 경우도 좀 있었다. 결정적으로 아무래도 사람을 '접대'하는 직업이다보니, 창기가 아닌 진짜 기생들도 사회적 인식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허난설헌]]이 지은 가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기방을 전전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않았던 시절이니, 기생은 창녀와는 구분되는, 생각보다 좋은 대접받는 존재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좋은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원래는 이처럼 예술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회기강이 무너지자 매춘 유무에 따라 은근짜와 더벅머리로 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된다.[* 이는 [[게이샤]]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군부에 의해 정부가 장악당하기 전까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사회 운동이 매우 활발하던 시기였는데, 이때의 혼란으로 인해 한때 게이샤와 같은 오랜 전통들이 [[악습]]으로 여겨져 배척받던 상황이라, 일반 유녀와 같이 게이샤들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게다가 일본은 [[보신 전쟁]]이나 [[세이난 전쟁]] 등을 거치면서 봉건적인 사회 체제가 한국보다 더 빨리 무너졌으므로, 게이샤들의 전통이 붕괴되고 왜곡되는 일이 기생보다 더욱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래도 게이샤는 현대까지 살아남았으므로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예인으로 재평가되어 인정받는 등 대접이 생각보다 좋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유녀=게이샤'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안 좋은 인식이 없어진 것도 아니라서 [[에도 막부]] 시기를 다루는 [[시대극]]에서 조차 게이샤가 성매매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고증오류가 빈번한 상황이다.] 현재 한국에서 기생=[[매춘부|창녀]]라는 인식은 이 시기와 현재 사극들의 영향이다. 이에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과 결합하여 오해가 더 심해진 경향도 있다. 이는 기생 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례로 그 당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그림들, 대표적으로 민속화 등은 '[[환]]'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춤이나 음악 등)은 상당수가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즉, 이들은 전통 예술을 전승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겸했다. 다만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전통예술은 주로 여성들이 부르던 춤이나 음악의 경우로, 남성들이 주로 하던 탈춤은 [[아전]]들에 의해 전승되던 것이다. 이것도 실은 [[관찰사]](오늘날의 도지사) 등의 [[높으신 분들]]을 관아에서 '접대'하는 과정에서 전승된 것인데, 아전들은 남자들인만큼 당연히도 문자 그대로의 접대만 했다[* [[tvN]]에서 방송한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이 부분이 잘 고증되었는데, [[아전]] 역으로 출연한 [[장동민]]과 [[김동현(1981)|김동현]]이, 이들이 근무하던 마을의 행정을 감사하러 나온 관찰사 역을 맡은 [[김주호]]의 앞에서 탈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가요]]가 전승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346&cid=46634&categoryId=46634|참조]] 기생 중 유명한 기생으로는 [[황진이]], [[논개]], [[운심]], [[홍낭]], [[이매창]] 등이 존재했고, 소설에서는 [[춘향]],[* 춘향의 경우 많은 이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냥 중인의 신분인 것도 있고 기생인 것도 있다.], 추월([[이춘풍전]]) 등이 유명하다. 참고로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다. 오히려 왕족과 혼인한 명문 종갓집의 영애였다. 기방에 우르르 몰려살며 [[매춘]]하거나 정말 운 좋게 첩으로 들어가는 것은 삼패기생인 더벅머리에 해당하는 모습인데, 커다란 방에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좌정하고, 여기에 한 명의 기생이 들어갔다고 한다. 각자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 많고 높으신 분들은 수준 높은 기생을 자기 집 후원에 불렀으니 그런 곳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더벅머리(삼패기생)들이 상대한 손님은 주로 높아봤자 양반 가문의 한량이나 군관, 무뢰배, 혹은 돈 꽤나 있는 중인 계층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신이나 북방 관리에게 기생을 두어 접대하게 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 '반계수록'에는 “오늘날 관아에서 창기를 길러 사객(使客)이 오면 얼굴을 단장하고 옷차림을 화사하게 하여 그를 접대하게 하는데, 술을 따라 권하고 악곡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니 이름하여 방기(房妓)라 한다.”라며 관아에서 접대를 위한 창기를 양성했음을 시사했다. [[병자호란]] 직후에 [[청나라]]에서 과도하게 기생의 시침을 요구했는데, 이에 반발한 기생들은 [[자살]]하여 항거했다고 한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7_0030_0040_0010|출처]] 벼슬아치에게 딸린 방기의 생활은 간혹 기생으로서 큰 연회같은 데에 동원된다는 것 빼고는 일반 어염집 아낙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모시는 군관에게 지급되는 양료로 살림을 하며 지냈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7_0030_0040_0020|출처]]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면 창기로 추측되는 이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창기라고 할 수 없는 게, 상술했다시피 조선시대에는 [[매춘부|창녀]]로 분류되는 이들이 따로 있었다. 일부 선비는 도저히 수준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 기생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지적 교류를 나눴다고 한다. 실제로 기생, 특히 상류에 해당하는 일패들은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지역에 따라 [[용비어천가]]나 [[유교]] 경전 등을 읊었고, 기생문학이 따로 남아있을 만큼 그녀들이 시를 쓰는 것도 흔했다. 이는 당연한 것이, 이패기생이나 삼패기생 같은 중하급이 아닌 이상 상대하는 손님들은 모두 상당한 학식을 지닌 선비들이며, 이들은 놀 때도 시를 읊고 사군자를 그리거나 학문과 나랏일에 대해 토의하는 것이 흔했다[* 현대에도 이런 사례가 있긴 한데, [[유럽]]에서 종종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 출신자들이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성매매]]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유럽이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한다지만 그건 현지의 [[영주권|영주권자]]나 [[시민권|시민권자]]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고, [[독일]]같은 몇몇 나라는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비싼 등록금을 그냥 내라고 하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유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래서 명문대를 나와놓고도 성매매 현장에 내몰린 사람들도 적지않은 편인데, 이런 고학력 [[매춘부]]를 소위 '에스코트 걸'(escort girl)이라고 한다. 당연히 [[외국어]]에 능통하고 아는 지식이 많아서, 정치인이나 재벌 총수같은 고위층을 주로 상대한다.]. 그러니 기생도 당연히 이에 맞춰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안동]]의 기녀는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의 기녀는 관동별곡을 읊고, [[함흥]]에서는 출사표를, [[영흥]]에서는 용비어천가를 읊었다. 북방이나 [[제주도]]에서는 말을 타며 기예를 뽐냈다 한다. 조선은 장신구까지 제재할 만큼 사치 금지법이 엄격했는데, 기생은 이에 대해 몇 안 되는 예외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화장은 금세 유행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사치금지법에서 자유롭지 못해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기생에서 유래하는데 [[연산군]] 집권시 '기생 양성소'가 궁궐 내로 들어가면서 기생은 '운평'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운평 중에서 예능이 밝고 색기가 뛰어나면 그 운평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왕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천과흥청'이라는 직급이 된다. 그렇지 않은 흥청은 '지과흥청'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흥청의 뜻은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현자타임|마음의 맑음을 유지한다]]'라는 명목하에 [[연산군]]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았다. 망청은 후렴구로 흥청의 흥(興) 자와 반대되는 의미의 망(亡) 자를 써서 연산군을 비웃는 의미다. 다만 운평을 반드시 기생들 중에서만 뽑은 것만은 아니고, 기생 출신의 첩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얼굴이 예쁘고 춤을 찰 추는 민간인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데려갔다. 나중에는 [[연산군]]이 명한 2천 명이란 수를 채우기 어려워 얼굴이 추해도 춤과 노래만 되면 죄다 끌고 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주류 학계에 속한 학자들은 이런 기록이 신빙성이 있어 보일 만큼, 연산군이 개막장 [[폭군]]이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후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 원래 의녀는 부인의 진료를 위해 뽑힌 일종의 의료직이었으나, '''[[연산군]]''' 대에 의녀도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생과 겸업하게 되었다. 1510년 [[중종(조선)|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뿌린 악습을 거둬내려고 한 중종의 노력이자, 기생에 대한 민중의 민심을 다잡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녀의 연회 참여는 이어져서 결국 '약방기생'이 의녀의 별칭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일패기생 등 고급 기생들의 능력과 대우가 높은 수준이었다고는 하나, 전근대 사회이자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가부장제 유교사회인 만큼 한계도 있었다. 지체 높은 남성을 접대하는 여성으로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재산을 모을 수는 있었으나, 그런 접대 대상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멸시가 없던 것도 아니고, 상류층을 대하지만 지체 높은 여성들 같이 정식으로 상류사회에 속하지는 못했다. 어쨌건 조선시대의 기생은 꽤나 알 만한 것도 아는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조선시대엔 기방오불이라고 기방에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가 있었다. >1) 기생의 약속을 믿지 말 것[br]_기생은 돈이 중한 처지이니 손님들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공수표를 날리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br][br]2) 문자를 읊고 자랑하지 말 것[br]_이것은 기생도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편이라 어설프게 문자 읊다가는 되려 망신당할 수 있고, 반대로 정말 학식 좀 있다 하는 양반가 사람이 문자 읊는 건 잘난 놈이 설교하는 꼴이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좋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라서다.[br][br]3) 꽃을 선물하지 말 것[br]_기생을 다른 말로 해어화, 말하는 꽃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이들을 우롱하는 모양새라 좋지 않기 때문이다.[br][br]4) 자기 처를 자랑하지 말 것[br][br]5) 가문의 열녀를 자랑하지 말 것[br]_이 두 가지는, 기생은 온갖 남자를 접대해야 하는 처지인데 그 앞에서 누구의 번듯한 정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나 [[열녀]]로 칭송받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듣기 좋을 리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