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우만 (문단 편집) === [[을사조약]] 이전의 행적 === 1879년 기정진이 사망한 뒤, 기우만은 34세의 나이로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부의 학문을 계승해 대일통 사상을 받들면서 서구의 신사상을 단호히 거부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정부가 개화 정책을 실시하고 신하들에게 서양의 옷을 입으라는 개복령을 발표하자, 기우만은 이를 적극 반대하고 '군주의 명'이라 할 지라도 따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마을 모임을 열어 동학도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했으며 동학에 가담한 유생들을 배척했다. 그러던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해 조선 유림들이 격분했다. 여기에 그해 겨울에는 [[단발령]]이 발표되자, 기우만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95년 12월에 <을미소(乙未疏)>를 올렸다. >신은 훼발의 명령을 들은 후로부터 문을 닫고 곡기를 끊어서 갑자기 죽어 세상을 올리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대개 황후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함께 [[와신상담]]해야 할 자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깍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典章)과 문물은 여러 성조(聖朝)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개변하여 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훼발령까지 이르니 혼란스러움이 지극합니다. > >대개 나라는 망하지 않음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하여 존재하기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은 죽지 아니함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시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라가 망함은 욕된 바이나 욕됨이 망함보다 심한 것이 있고, 사람의 죽음은 미워하는 바이나 미워함이 죽음보다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차라리 망하고 사람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몸을 보존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1896년 1월 [[유인석]]이 경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기우만 역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그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20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나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하고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이후 상소를 올려 의거를 보고했지만 전달되지 않았고, 사방에 통문을 돌려 30윌 광주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2월 27일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는 왕명을 전하자,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했다. 이후 그는 삼성산 꼭대기에 삼산재를 짓고 그곳에 줄곧 머물며 외부 활동을 끊었다. 그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제부터 우직하게 처세를 하고 싶지만 >커다란 집을 누가 기둥하나로 버티겠는가. >서툰 목수가 제 손만 다치는 것을 이제 알고서 >목을 움츠리고 산에 들어와 썩은 선비가 되었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기우만은 산에 올라 통곡하고 삿갓, 의복, 이불을 모두 흰색으로 하여 예를 갖추었다. 이 때 고종이 사람을 보내 귀가할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지인 조성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엎어진 둥지에 온전한 알이 없듯이, 현인군자들이 유리되고 도망쳐 숨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저 집에 사는 제비가 어찌 화가 장치 미치려 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합니다. 군자는 곤궁 속에서 형통하니 바로 이때가 그렇습니다. 지리산 바위동굴에서 크게 『춘추』를 읽는다면 어찌 꼭 노중련(鲁仲连,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처럼 동해를 밟고, 백이(伯夷, 은나라 말엽의 사람)처럼 수양산에 오를 것이 있겠습니까? 저의 처신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했으니 삼성산 산중으로 들어가 수풀 속에 집을 지어 인생을 마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 5칸짜리 집을 지어 지난달부터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집과의 거리는 5리로 가깝습니다. 멀리 보낼 편지라 감히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