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전체 (문단 편집) === 본기(本紀)[* 또는 기([[紀]])] === [[천자]], 특히 [[황제]]의 전기(傳記). 각 왕조의 연대기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마냥 여러 왕조를 서술한 특이케이스가 아니라 하나의 왕조만 다루는 사서라면 본기만 쭉 따라 읽으면 편년체 사서를 읽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 명분보다는 실세를 중시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항우]], [[여후]]의 전기가 본기로 분류되어 있는데 항우는 잠시 천하의 제후들의 위에 군림했으며 여후는 [[혜제]]를 대신한 사실상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반고]]의《[[한서]]》에서는 항우는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혜제 시기의 경우 '혜제기'가 따로 있다.[* 다만, 한서에서조차 여후는 본기에 들어있다. 여후 본인의 기록과 두명의 소제에 관한 기록은 고후기(高后紀)라 하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각각 본기(本紀)로 작성했는데, 보통 하나의 정통 왕조만 본기로 삼고 나머지는 열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하면 특이 케이스이며[* 물론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서 원나라 시기에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송나라만 본기에 기록하느냐 요와 금을 묶어 북사로 남송은 따로 남송사로 편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뉘었는데 결국 세 왕조 모두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역사서를 편찬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해서 나온게 [[송사]], [[요사]], [[금사]]다.] 한편으로는 이를 편찬한 고려왕조의 [[외왕내제]]적 역사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려는 스스로도 삼한일통을 다시 달성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건국 이후 비교적 꾸준하게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또 내부적으로 아무래도 처음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를 계승했다는 의식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 둘 중 하나를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