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전체 (문단 편집) === 열전(列傳) === 본받거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신하나 일반인의 이야기. 일종의 전기 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기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딱딱한 본기에 비해 개인을 주인공으로 서술해 재미도 있기 때문에, 국내의 《사기》 번역서들을 보면 열전만 발췌, 번역한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전체 사서는 열전 부분이 중국 사서에 비해 좀 부실한 편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김유신]]열전 빼고는 거의 날림 수준. 이는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이 삼국시대 당시에서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사기 집필 당시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은 인물들인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오죽하면 김유신 열전도 그 외의 기록이 부실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사료로 쓰지 않을 [[김유신행록]]을 설화적인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만든 것이라 기록해 두었겠는가. 게다가 그 설화적인 내용을 줄였는데도 김유신 열전과 신라본기를 보면 내용이 엄청나게 차이난다.] 또한 인물의 전기 외에 주변국에 관한 기록도 열전에 기록한다. 가령 [[명사(역사책)|《명사》]]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다룬 조선전, [[일본]]에 관한 기록을 다룬 일본전 등이 열전에 실려 있다. [[유비]]나 [[손권]],[* [[정사 삼국지]]는 [[조위정통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조위, 사마진 황제들만 본기에 있다.] [[궁예]]나 [[견훤]],[* 삼국사기에서는 후삼국시대의 경우 [[경순왕]]까지의 신라, 고려사에서는 [[왕건]]부터 시작되는 고려 왕통만을 정통으로 간주해 본기 및 세가에 실었다.] [[우왕]], [[창왕]][* 당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이들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붙여 주살하고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훼손되었음을 주장, [[공양왕]] 과도기를 거쳐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도 신씨라고 바꿔서 신우, 신창으로 썼다.] 등 실제로는 군주였더라도 사서 편찬자의 판단에 비정통 군주로 보는 경우도 열전에 쓴다. 항우와 여후를 본기에 썼던 사마천의 사기가 특이 케이스. 열전의 경우는 수많은 인물을 한가지 특징을 잡아서 묶기 때문에 본기에 비해서는 양이 적으며 한명이 열전 2~3권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차이점을 보자면 일단 나라가 지속했던 기간에 비해 양이 중국사에 비해 적으며 정도전, 조준 같은 인물이 아닌 이상 한권에 중국사에 비해 수많은 인물이 묶이는게 특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