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형도 (문단 편집) == 생애 == >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 질투는 나의 힘 [[1960년]] [[3월 13일]], [[경기도]](현 [[인천광역시]]) [[옹진군(인천광역시)|옹진군]] [[연평도|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의 피난민 가정에서 3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연평면사무소에서 주택가쪽으로 연평중앙로를 따라 내려오면 2번째 블럭에 위치해 있다.] 유년 시절인 1965년에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701-6호)로 이사하였다. 특히 대표 시 <안개>는 소하동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서울시흥초등학교]], [[신림중학교(서울)|서울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지금이야 [[서울특별시]]와 [[광명시]]의 학군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지만, 시 승격 이전의 철산동 일부, 하안동, 소하동 일대에 거주하는 취학 연령자들이 서울 소재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 같이 활동한 회원 중 한 명이 법학과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다.]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경기도 [[안양시]]의 모 부대[* 100훈련단 예하 연대 또는 167연대나 수도군단으로 추정된다.]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소집해제할 때 감정을 담은 [[http://www.poemlove.co.kr/bbs/board.php?bo_table=tb01&wr_id=58850|《제대병》]]이라는 시가 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했다.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으나 1989년 3월 7일 새벽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파고다극장에서 소주 한병을 든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때 상영하고 있던 영화는 뽕 2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에로 영화처럼 알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에로티시즘]]이 들어있을 뿐 내용은 의외로 괜찮은 영화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당시 만 28세로,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입속의 검은 잎"은 데뷔 이후 첫 시집이자 유고작으로 남았다. 그는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 묘소의 바로 옆에 시인보다 2년 뒤에 돌아가신 시인의 아버지 무덤이 있다.]에 묻혔다. 뇌졸중은 일종의 가족력으로, 그의 아버지가 이로 인해 쓰러진 것에 대해 자신도 그럴 것이라는 비관적인 사고를 생전에 가졌다고 [[http://m.hani.co.kr/arti/culture/book/833806.html#cb|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고혈압도 있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