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재호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4월 15일]] [[평안북도]] [[영변군]] 고성면 사오리에서 아버지 길정백(吉廷伯, 1897.01.04 ~ 未詳)과 어머니 [[양(성씨)|남원 양씨]](南原 梁氏, 1899.06.04 ~ 未詳) [* 양응수(梁應洙)의 女]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자녀는 무남삼녀를 두었으며, 위로 형 길재동(吉在東)이 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교하여 그해 5월 임관하였다. 임관 후 [[국민대학교]] 법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 때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신윤창]] 등과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군사정부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및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금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내리 3선(제8대는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본인은 금산군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변군]] 출신의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이지만 같은 가문인 [[해평 길씨]] 집성촌이 있는 금산군[* 부리면에 있다.]을 정치기반으로 삼았고 때문에 [[전라북도]] 소속이던 금산군을 [[충청남도]]로 편입시키는 데 힘을 썼다고 한다. 1966년 1월부터 1969년 7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있었는데, 1969년 7월 사무총장직을 사임하기 직전 [[3선 개헌]] 논의를 제기하였고,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길재호는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정치인)|김진만]]과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민주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손잡고 당내에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견제하면서 [[3선 개헌]]을 성사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1971년 10월 2일 김성곤 등과 함께 야당인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제출한 오치성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장관]](현 [[행정안전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가결시키기로 하여 가 107, 부 90, 무효 6표로 가결되었다. 이를 [[10.2 항명 파동]]이라 한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에 의해 김성곤처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여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1980년대 [[생명보험]]협회 회장을 역임하다가 1985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9280020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9-28&officeId=00020&pageNo=7&printNo=19690&publishType=00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