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경문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인천광역시|인천]] 출신이며,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학창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다. 위로 형이 많아서[* 8형제 중 막내[[https://mnews.joins.com/article/2665079#home|#]] 첫째 형과는 17살 차이가 난다고. 김경문의 모친은 1917년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형들과 야구를 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인천송림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대구광역시|대구]]로 이사하여 야구 명문인 옥산초등학교로 전학하고 여기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같이 활약했던 직속후배로 [[김성래]]가 있는데 프로에 와선 코치와 선수로 재회했다.] 이후 대구 [[경상중학교]]에 다니다가 가족들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이사하게 되어 부산 동성중으로 전학하게 된다.[* 같은 재단의 부산동성고는 배구부로 유명하다. 부산동성중은 학생수 감소로 2005년 폐교됐다.] 동성중 시절 한 학년 후배[* 김경문은 1958년생인데 1년을 유급해서 1959년생과 동기며, 양상문은 1961년생인데 1년을 조기입학해서 1960년생과 동기이다.]였던 [[양상문]]과 선후배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훗날 양상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김경문이 공주고로 오라고 권유도 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98HTA8.jpg|width=100%]]}}}|| ||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등학교]] 시절 김경문 || 부산 동성중을 졸업하고 [[부산고등학교 야구부|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당시 야구부를 재창단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등학교]]가 당시 야구 불모지였던 충청도에 선수층이 없어 외부 전학생들을 대거 모집하고 있었는데, 김경문에게도 숙식 및 학비 제공을 제시했다. 김경문 본인의 말에 따르면 부산고보다 공주고에서 주전 경쟁이 덜 할 것 같아서 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공주고로 스카우트되어 전학을 가면서 그의 야구 인생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중간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전국대회에서 선수 이중등록이 되어 선수등록 취소라는 징계를 받게 되었고, 이때 김경문은 야구를 접을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김경문이 공주고로 전학 온 후에도 공주고는 계속 각지에서 선수를 모집했고, 야구부 해체설이 돌던 대구 대건고 야구부에서도 몇 명이 전학왔는데, 그중에 [[조범현]]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김경문이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고 성적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와 학교도 먼저 온 김경문을 더 편애하는 분위기도 있었기 때문에 조범현은 몇 개월만에 다시 대건고로 돌아갔다.[* 이후 알다시피 조범현은 대건고가 결국 해체되면서 다시 충암고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김경문은 타격에서도 고교 탑클래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생팀이 갑자기 뜨자 원래 충청도의 전통 야구 명문고였던 대전고가 여기에 크게 위협을 느끼고 경기 때 고의로 김경문의 머리를 배트로 강타해버린다. 김경문은 뇌진탕으로 쓰러졌고, 회복 후 포수로서의 기량은 여전히 변함없었지만 타격 능력은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경문이 주축으로 활약한 공주고 야구부는 1977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로 인해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학교]][* 동기로는 [[박종훈(1959)|박종훈]] 한 학년 아래로 [[양상문]]이 있었으며, 방장 시절에는 여드름으로 고생하던 신입생 방졸 [[선동열]]을 데리고 피부과에 간 일화도 있다. [[http://osen.mt.co.kr/article/F1000018679|#]]]에 진학 할 수 있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2.bp.blogspot.com/8%25EC%259B%259416%25EC%259D%25BC4_00002.jpg|width=100%]]}}}|| || '''OB 베어스 현역 시절''' ||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는데, [[조범현]]도 동시에 OB에 입단하게 되었다. 공주고 출신 김경문은 OB의 충청도 연고지 출신 선수로 먼저 입단이 결정되었고, 충암고 출신 조범현은 MBC와의 서울 연고 2:1 드래프트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원년부터 둘은 치열한 포지션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IMG_0655.jpg|width=100%]]}}}|| 현역 시절 타격은 좋게 말하면 그저 그랬다. 사실 말이 좋아 그저 그랬다는 거지, 프로 10년간 통산 타격성적이 타율 0.220, 6홈런, 126타점에 불과했다. 고교 시절에 입은 뇌진탕을 감안하면 저 정도 성적이나마 낸 것도 나름대로 애를 쓴 거겠지만, 냉정히 말해 타격 실력은 프로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야구친구의 [[http://yachin.co.kr/w/7/34|2014년 3월 6일자 상식과는 조금 다른 야구 이야기 코너]]에 의하면 김경문이 500경기 이상 출전했던 은퇴 선수들 중 타율이 가장 낮은 '역대 최악의 타자 10위'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주전경쟁을 하던 조범현은 김경문보다도 타격 능력이 바닥을 뚫고 있었고, 조범현과의 치열한 주전 경쟁은 김경문은 근소한 판정승으로 끝났다. 이는 출장 경기수에서 조범현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역대 통산 최저 타율 2위가 바로 조범현(0.201), 1위는 [[염경엽]](0.195).] 김경문은 부족한 타격을 뛰어난 포수 수비력으로 메꾸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조범현이 도루 저지율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지만 김경문 역시 훌륭한 수비형 포수였고, 1할대를 오가는 조범현보다 타격이 확실히 한 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조범현에 비해 확실한 비교우위의 툴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80년대 중반 OB에서 5년이나 감독을 역임했던 [[김성근]]이 고교 시절부터 양아들이라 불렸던 조범현을 선호했기에 조범현의 출장 기회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김성근이 아닌 다른 감독이 부임했다면 조범현과 출장 경기수 차이를 더 크게 벌렸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OB에 있으면서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멤버로서 활약하면서 공을 받았던 선수다. 또 1988년 [[장호연]]의 공을 받으며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경험하기도 했다. OB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당시 태평양 감독이던 김성근의 의중에 따라 1990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1년만에 다시 OB로 복귀했고 OB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kmib.co.kr/201606211619_61160010720726_1.jpg|width=100%]]}}}|| || 팀 후배 김태형과 함께. 이후 두 사람은 [[2015년 포스트시즌]], [[2016년 한국시리즈]], [[KBO 플레이오프/2017년|2017년 플레이오프]]까지 감독으로서 총 3번 대결했고, 모두 [[김태형(1967)|김태형]] 감독의 승리였다. 2016년 한국시리즈 직후 우승팀의 김태형 감독은 김경문 감독 앞에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