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경천 (문단 편집) === 초년기 === || [[파일:attachment/김경천/Kinkouzui2.png|width=300]] || || 김경천의 아버지 김정우 || 김경천(金擎天)은 [[1888년]] [[6월 5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해안사 승평리(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부친 김정우(金鼎禹)와 모친 윤옥연(尹玉蓮)의 5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1895년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 [[게이오기주쿠대학|경응의숙]] 보통과, 동경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학교(順天求合社學校) 공업예비과, [[도쿄공업대학|동경고등공업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총탄제조 견습을 마치고 귀국해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조선 육군 최고위층 인사였다. 김경천은 8살 때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9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거주하는 부호 유계준(柳桂俊)의 딸 유정화(호적명: 유정(柳貞))와 결혼했다. 김경천이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에 혼인 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경천은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후 김경천은 부인을 일본으로 불렀고, 두 딸 지리(知利)와 지혜(智慧)를 낳았다. 김경천은 17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때 한국인이 그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천황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22살에 육군사관학교 전과정을 마쳤다. 졸업 성적은 언어상 불리하여 1등을 못했지만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의 졸업생들을 포함하여 최우등이었다.[[http://blog.naver.com/yukin48/50139171382|#]] 재학중이던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그는 졸업 후 일본군 장교 임관을 거부하려 했으나 독립전쟁을 위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처먹고 임관했다. 이에 대해 일본육군사관학교 45기인 이형석(李炯錫)은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홍사익]]의 말을 들으면 그는 한참 혈기 왕성한 때에 유학을 갔다가 조국이 강압적 합방을 당하고 보니 그 젊은이들의 비분강개야말로 불가형언으로 안절부절이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꼬하마인가 어딘가 시골 어떤 요정에서 대소통곡한 끝에 어떤 사람은 곧 전원이 퇴학하고 돌아가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중교 앞에 가서 전원이 자결하여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보자고 하였는데, 결국은 [[지청천]]의 주장에 따라 우리가 이왕 군사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다음 장차 중좌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하여 총궐기하자는 맹세로서 결론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형석, <지청천>, '한국 근대인물백인선', 신동아 1970. 1월호 부록, p.243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도쿄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16년 12월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조직한 친목단체 전의회(全誼會)를에 가담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의회는 표면상 친목단체였지만 실제로는 국제정세와 조선의 상황 등에 관하여 논의하며 자신들의 향배에 대해 숙고하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휴가를 얻어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동지를 물색했으며,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 자금을 준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