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경철 (문단 편집) == 대중매체에서 == 5.18 최초의 희생자인지라, 그를 조명한 문학 작품은 꽤 여러 개 있다. ||<오월 일기예보> -서해성 그 5월은 더웠다. 평년보다 얼마나 더 기온이 상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타살된 시신이 썩기에는 더 없이 알맞은 날씨들이었다. 그리고 벙어리가 죽었다. 도청 분수대에서 저녁부터 횃불성회가 있었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분수대에서는 물기둥 대신 인간 함성이 뿜어 올랐다. 기온이 오르지 않아서였을까. 그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5월 17일은 맑은 토요일이었다. 20.9°C. 손목을 채운 [[수갑]]의 차가운 느낌을 느끼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예비검속으로 사람들은 끌려갔다. 벙어리는 양화점 가게에서 가죽을 잘라내고 구두를 기웠다. 헬리콥터가 도시 밤하늘을 오래 비행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튿날 도시는 기온이 급상승했다. 그날은 구름이 짙었는데도 기온은 섭씨 25.1°C였다. [[일요일]]이었고, [[5월 18일]]이었다. [[광주광역시]] [[1980년]]이었다.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을 막고 있는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교문을 밀치고 시내로 밀려나가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면서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조심스럽게 섞여 들었다. 그 과정에서 4백명 넘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오후 4시 [[육군특수전사령부|공수부대원]]은 벙어리를 낚아챘다. 구두를 만드는 스물여덟 살 먹은 제화공. 김경철은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는 [[복지카드|농아신분증]]을 꺼내보이면서 손짓 발짓으로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걸 희롱하는 걸로 알아 들은 공수부대원은 군화발로 얼굴을 짓이기고 몽둥이를 입에 쑤셔 넣고 말을 하라고 했다. 구호 한 마디 외칠 수 없었던 벙어리는 맞아 죽었다. 그는 그해 5월 첫 타살자였다. 그는 침묵의 비명으로 [[타살]]되었다. 밤 9시 광장에 모인 6천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벙어리 대신 꺼이꺼이 외쳤다. 이튿날 새벽 3시 [[월요일]], [[5월 19일]] 벙어리는 광주적십자병원에서 죽음을 확인했다. 가랑비 5.6MM가 뿌린 낮 최고 기온은 섭씨 22℃였다. 벙어리가 죽기 좋은 온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36.5℃였던 그의 몸은 22℃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죽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화요일 [[5월 20일]]에는 낮비가 제법 내렸다. 12MM였고 비 때문에 온도가 내려가 17.5°C였다. 그래도 더웠다. 알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저녁 7시에 2백여대 택시와 버스가 경적 시위를 했다. 한 시간 뒤 3공수부대에게, 11공수부대에게 실탄이 분배되었다. 밤 10시 궁동에 있는 [[MBC|두]] [[KBS|방송국]]이 불타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항쟁 당시 MBC만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있지만, [[KBS광주방송총국]]역시 사옥이 시민군의 [[방화]]공격을 받아 전소되었다. [[KBS광주방송총국]]이 전소된 것은 5월 20일 낮, [[광주문화방송]] 사옥이 공격을 받은 것은 5월 21일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밤 11시 공수부대가 [[광주역]]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구경 5.56MM짜리 소총 탄환은 날아가면서 보았다. 도청 앞에서는 10만 명이 밤을 새워 집회를 벌였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 밤, 그들이 사랑해야 할 조국은 그들에게 총알을 퍼부었고, 그들은 더 오래 노래 불렀다. 어머니는 통합병원에서 죽은 아들을 보았다. 처치 받은 것은 포도당, 삐콤, 타치온이 전부였다. 벙어리의 몸은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이따금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맞아죽었다. [[5월 21일]] [[수요일]]은 휴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부처님도 쉬었다. 틀림없이 쉬었다. 그날 낮 12시 55분경 도청 앞에서 탄환은 [[애국가]] 후렴 ’대한 사람 대한으’와 ‘로’ 사이에서 발사되었다. 계엄군의 총알은 ‘애국가’를 꿰뚫고 갔다. 찢어진 애국가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개새끼들아, 왜 조준사격 안 하는 거야! 탄약을 나눠주면서 외치는 중대장의 질책은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기도소리였다. 모른다. 부처님이 방금 발사된 뜨거운 탄피 사이에서 수도중이었는지도. 부처님이 쉬고 있던 그 오후에 사람들은 대신 무기고로 달려갔다. 도시 밖으로 연결된 전화를 포함한 모든 통신이 차단되었다. 저녁 7시 반쯤에 도로가 끊겼다. 계엄군은 그 경계선까지 물러나 있었다. 바깥 세상과 절연된 도시의 밤은 피 흘린 채 고요했다. 종일 맑은 그날 온도는 26.1°C였다. 얼마나 고요한 온도인가. 밤새 [[광주광역시|남도의 도시]]에서는 더 많은 감꽃이 흰 옷을 입고 떨어져 내렸다. 그 중에는 벙어리 몫인 감꽃도 들어 있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한 걸 안 건 다음날이었다. 구름이 많이 끼었고 [[5월 22일]] [[목요일]] 최고 온도는 28°C였다. 사람들은 몰려나와 밥을 나누고 살아있음을 서로 확인했다. 일상이 너무도 평온해서 난리가 나고 학살이 일어났다는 게 도리어 기이할 지경이었다. 벙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몸이 썩어가고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5월 23일]]은 날이 흐렸다. [[주남마을 총격사건|미니버스를 탄 사람들이 주남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생존자 3명 중 2명을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즉결처분했다.]] 손목에 총상을 입고 혼자 살아남은 여고생은 군인들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왜 귀찮게 데리고 오냔 말이야! 저승 사자들은 한국말을 사용했고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너무 일상적인 어투였다. 그들의 이름은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다. 소녀가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기온은 섭씨 25.8°C였다. 25.8°C는 너무 뜨거운 온도였다. [[토요일]]날에 군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총질을 해서 쏴죽였다. 탄환은 구경 [[M16 소총|5.56MM]]이거나 [[M1 카빈|7.62MM]]였다.[* 위 대목은 5월 24일 광주시 남구 송암동에서 벌어진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여단 인원들 간의 오인총격전을 묘사한 것이다. 긴장하고 있던 광주 보병학교 인원들이 11공수의 [[KM900]]장갑차를 시민군이 탈취한 장갑차로 오인하고 쐈다는 주장이 있다.] 탄환은 12.6MM 비가 내린 5월 24일 섭씨 26.8°C의 허공을 갈랐다. 죽은 벙어리는 더웠다. 그가 말없이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남도는 더웠다. 두 번째 일요일인 [[5월 25일]] 이틀째 낮비가 뿌렸다. 누군가 도청 벽에 [[미드웨이급 항공모함|미국 항공모함 2척]]이 한반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아직까지 항공모함에 [[민주주의]]가 실려온 적은 없었다.[* 당시 한국에 와 부산항에 정박한 항공모함은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의 3번함 코럴시(CV-43 Coral Sea)였다. 이 소식이 [[투사회보]] 등 대자보를 통해 전해지자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국가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광주를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코럴시의 임무는 급변하는 한국 상황을 대비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무력시위와 유사시 한국 내에서 철수하는 미국 민간인에 대한 수송 업무였고, 당연히 두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부산항에 잘 정박해 있다가(...) 항쟁진압후 한국을 떠났다. 당연히 이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군의 방관/조장 논란을 가속화시켜서 80년대 대한민국에 [[반미]]감정이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강수량 26.1MM 비가 내린 이 도시만 예외일 리 없었다. 낮 온도는 23.3°C였다. 벙어리의 몸이 마저 문드러지기에 알맞은 온도였다. [[5월 26일]] 월요일은 비 끝에 온도가 떨어져 19.1°C였다. 여전히 죽은 자들의 몸은 썩고 있었고, 썩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더웠다. 자정까지 도청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 때문에 시신은 더 빨리 부패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항쟁 지도부가 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벙어리의 몸은 잠시 썩는 걸 멈추고 대변인 [[윤상원(1950)|윤상원]]의 목소리에 들리지 않는 귀를 기울였다.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투항 권고 [[삐라]]를 뿌렸다. [[K-111|가두방송 차량]]이 광주를 지켜달라고 애원하면서 밤길을 내달려갔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침묵의 새벽이 골방마다 벙어리처럼 울었다. [[5월 27일]] 새벽 8°C 기온 속에 계엄군 20,317명이 도청을 향해 1만여발의 사격을 가했다. 남아 있던 시민군은 157명이었다. 그 아침에 26명이 사살되었다. 핼리콥터는 도청 일대를 비행하면서 탄환을 쏟아 놓았다. 5.56MM와 3inch 탄환이었다. 태양은 스물여섯 명의 피를 머금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다. 안개도 끼질 않았다. 진압이 끝난 낮 온도는 22°C였다. 물청소를 마친 금남로 도로는 오가는 차 한 대 없이 말끔했다. 날도 맑았다. 화요일이었다. 너덜거리는 벙어리의 시신이 트럭에 실려갔다. 가슴을 대검으로 찔려 죽은 여성[* 5월 21일 사망한 손옥례씨를 묘사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다가 아버지로부터 외출이 너무 잦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듣고 집을 나갔다가 시위에 휩쓸려 변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충격을 받고 쓰러져 이듬해 사망했고,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동생도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신군부가 기입한 그녀의 사인은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총상, 하악골 총상, 좌측골반부 총상, 대퇴부 관통총상, 우흉부 관통총상'''이었는데, 바꿔 말하면 '''총알을 5발씩이나 맞고 대검에 왼쪽 가슴을 찔려 사망'''했다는 뜻이다. 그녀의 죽음은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에도 언급되어 있다.]도 트럭에 실려갔다. 트럭에 실려가지 못한 채 살아있던 사람들의 살이 어디선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5월은 더웠다. 실제로는 평년 기온과 그닥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더럽게 더웠다. 이것이 인간이 5월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벙어리의 몸이 썩고 있는 도시는 덥다. 산 자가 썩어가는 모든 대지는 덥다. || 2007년 개봉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도 그를 모티프로 한 장면이 나온다. 금남로에 저지선을 치고 주둔하는 계엄군에게 장애인이 몰매를 맞아죽고, 다음날 리어카에 실려 길가에 버려진 그의 시신에 아버지가 태극기를 덮어주며 흐느끼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말을 할 줄 아는 [[지적장애인]]이었고 계엄군들 앞에서 군인 흉내를 내며 [[방탄모]]를 빼앗아 쓰는 등 어그로를 끌다가(...) 리미터가 풀린 군인들에게 맞아죽는지라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사실 화려한 휴가는 미흡한 연출 문제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2017년 개봉한 [[택시운전사]]에도 김경철의 사망일자 대사가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