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광제 (문단 편집) === 초년기 === 김광제는 1866년 7월 1일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지만 일찍 한학을 수학했고 강연집과 많은 글을 남긴 것을 볼 때 일찍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3세 때인 1888년에 관직으로 나아가 훈련원 참정, 비서원승, 호남시찰, 동래경무관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왕궁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김광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래경무관 직을 사임한 뒤 같은 해 12월 배일 및 부패 대신 탄핵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친 듯한 물결이 이미 쏟아져 흐르고 들에 놓은 불길 이미 타올라 마침내 삼천리 강계와 오백년 종사를 쉽게도 이웃 나라에 주게 되었습니다. 저 이웃이란 바로 삼백년에 걸친 원수 나라인데 저 이웃나라가 이 뭇 간악한 자들을 끼고, 이뭇 간악한 자들이 저 이웃 나라에 붙은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폐하께서는 이 뭇 간악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이 뭇 간악한 자들을 총애하시고 이 뭇 간악한 자들을 믿으시니 그것은 그 어떤 연유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 >이른바 관리 등용의 임무를 맡았다는 자들이 관직을 팔아먹는데 폐하꼐서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어 쓰시고, 이른바 형벌을 담당한 관리는 제멋대로 사사로움을 따르는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믿으시어 부리고, 총애 받는 신하와 뭇 흉악한 무리들이 금방 러시아에 붙었다 금방 일본에 붙었다 하여, 마침내 외화를 초래하고 가렴주고하고 탐학한 무리들이 안을 좀먹고 밖을 갉아대어 마침내 여러 정무를 어지럽히는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총애하여 가까이 하시니, 이는 모두 수십년 내의 이미 싹든 폐단으로 비록 어리석은 평민들도 오늘의 화를 미리 염려했던 것인데 폐하께서는 뛰어난 천고의 성스러운 총명으로 오히려 헤아리실 수 없으셨습니까? > >이미 비워보시고도 일부러 행하시고 이미 밝혀보시고서도 그만두지 않으시니, 이것이 진실로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진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일본을 배척하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또한 지혜를 헤아리지 않고 일본에 붙는 것보다는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신이 일컬음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마땅히 행할 것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저 간악하고 잡된 무리들과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도당, 죽 일본을 배척하면서 화를 배양한 자들과 일본에 붙어 화를 초래한 자들이 모두 오늘의 종사를 망치고 기반을 뒤집는 역신입니다. 저 일인들이 비록 그들의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타고난 본성은 같을 것이니, 일인들도 그 사람들이 죽어야 할 적도들임을 반드시 알 것인데도, 폐하꼐서는 오늘날 도리어 총애하시고 높이 쓰시고, 사랑하시어 믿고 가까이 하시니,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날로 배반하고 여론이 날로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 >빨리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높은 거리에 매어 달지 않는다면, 밖에서 오는 재난과 이웃나라의 침입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에 속하리니, 흉포한 무리보다 이것이 가장 대처하기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외세에 의지해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무리를 먼저 즉시 죽일 것이니, 특별히 성총을 힘쓰시어 맹렬히 살피시고 재야의 어진 이를 널리 구하여 일을 맡기고 부리옵소서. 교육으로는 넓히기를 힘쓰시고, 법률로는 맑게 하기를 힘쓰실 것이며, 안으로는 가렴주구하는 신하를 제거하시고, 밖으로는 탐욕스럽고 모진 관리를 엄히 다스리시면, 나라의 공업이 날로 공고한 데로 나아가고 이웃의 업신여김도 해가 감에 따라 점차 저절로 물러가서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강해질 것이며, 은혜가 흡족해지고 가르침이 행해지면 몇년 되지 않아 저들의 업신여김도 보복할 수 있고, 저들의 욕보임도 씻을 수 있고, 저들의 위협도 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후략) >---- ><석람김광제선생유고집>, 상유문 김광제는 상소를 올린 직후 전라도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06년 1월 대구로 내려가서 광문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 편찬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시키고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착수했다. 또한 1906년 2월에는 대구광문회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 및 강사를 겸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