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광진(북한) (문단 편집) == 스캔들 == 보성전문 교수 시절, 평양에서 [[체호프]]의 ‘앵화원’이라는 연극을 관람하였다가, 거기에 출연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 [[노천명]]에게 반하였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하였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평양의 개운사에서 처음 만난 이래 그들의 연애는 불꽃을 튀겼으며, 김광진은 곧 아내와 이혼하고 노천명과 재혼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러 경성으로 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천명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김광진의 동료 교수였던 [[유진오]]는 잔인하게도 이 스토리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써버렸다. 이에 격분한 [[모윤숙]], 이선희 등 동료 여성 문인들이 모델을 밝히라며 유진오를 찾아가 삿대질을 하며 싸웠는데, 이러한 소동은 노천명의 수모를 세간에 더욱 더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김광진이 노천명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내와의 의리때문이 아니라, [[기생]] 출신의 1930년대 인기 가수 '''왕수복''' 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왕수복은 본디 [[이효석]] 죽기 직전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1935년 실시된 인기투표에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을 3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을 만큼 당대의 스타였다. 그녀는 미모의 기생 출신이지만 유학을 떠나 음악을 공부하여 [[성악가]]가 됐으며, 평양의 대학 교수로서 종생했던 의지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면모들은 무려 14살이나 연상이었던 김광진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담]]으로, 노천명은 이걸 보고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김광진은 보성전문 교수직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며 왕수복과 같이 살았다. 남북 분단 이후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고, 왕수복은 공훈배우가 되었다. 김광진은 1986년에 죽었고, 왕수복은 나이 여든에 [[김정일]]의 호의로 ‘독창회’까지 열고 2003년에 죽었다. [[분류: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분류:북한의 경제학자]][[분류:1903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 [[분류:히토쓰바시대학 출신]] [[분류:애국렬사릉 안장자]][[분류:중구역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