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구 (문단 편집) == [[김구/일생|일생]] == [[조선]]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안동 김씨]](구 안동 또는 선 안동) 익원공파로, 집안은 약 300년 전 [[김자점]] 역모 사건 이후 몰락했다. 김구는 어려운 가운데도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시험에 낙방해 떨어졌고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사라졌다.[* 나라가 부패해 그렇다고 울분을 토했다는데 믿거나말거나. 사실 당시 조선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건 사실이지만, 과거 시험 자체가 작금의 고시에 비유해도 좋을 만큼 세도가의 자제들도 꽤나 붙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김구는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구' 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반기를 이끌던 지도자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가 모두 이탈, 독자세력화 하면서 규모와 정통성이 공히 크게 약화된 임정을 이끌었고, 과감한 항일 활동으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 분단을 막으려 노구를 이끌고 [[1948년]] 평양 개최 '민족통일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당시 [[김일성]]한테 냉대만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 등과 대립하였으며,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 김구는 1940년대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기 대부분을 미주에서 보냈으며 임시정부 대통령직 태만, 세금 유용 혐의로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하지만 탄핵 이후에도 임정에서 외교 관련 직위를 유지하며 김구와 연대 관계를 이뤘다.]과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 사실 김구와 이승만 둘이 대립하던 시기는 [[장덕수]] 암살 이후부터 김구 암살까지의 짧은 기간에 국한돼 있다. 임정에서 시작해 광복 직후의 시기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건 사적으로건 상당히 절친한 연대 관계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임정 현상유지론을 고수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반공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노선과 성향이 일치했고, 사적으로는 한 살 차이라 김구가 이승만을 "형님", "우남이형"이라고 불렀을 정도.] 기타 자세한 행적은 [[김구/일생]]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