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구 (문단 편집) == 사상 ==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광복|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광복|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광복|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한류|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단, 도진순 교수에 따르면 이 단락은 이광수의 창작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여담으로 이광수가 백범일지에 참가하게 된 연유에 대해 김구의 차남인 김신은 "춘원(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백범일지의)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라고 [[1986년]] 신동아 8월호에서 밝혔다.][* 2020년대에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영화)|기생충]], 드라마 [[킹덤(한국 드라마)|킹덤]], [[오징어 게임]]이 해외에서 큰 호평을 받고 인기를 끌자 인용되는 일이 부쩍 늘었다.] >---- >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일반적으로 파쇼라고 한다. > >나는 우리나라가 [[공산주의|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 >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현실사회주의|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의 변증법, [[루트비히 포이어바흐|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 >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 김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록이다.]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내 나이 73세,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아래에서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中 [[광복]]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 김구는 광복개조파와 창조파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파라는건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거라 지금으로 보면 상당수 좌파 계열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범위의 개념이긴 하다. 작금의 민주당계 정당이나 해외의 상당수 리버럴계 정당들도 이 기준에선 최소 중도~중도우파.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저서에서 자긴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썼다.] 김구의 정치 노선은 '''[[좌우합작운동]] 전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 좌우합작운동 전인 [[일제강점기]] 당시 김구는 [[김립 피살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을 굉장히 경계했고,[* [[김립(1880)|김립]]을 비롯하여 자금 부정 의혹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임정 시절에 김구가 몰두했던 작업 중 하나가 다름아닌 다른 좌익 운동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8.15 광복|광복]] 후에도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도우파들과는 달리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구는 지청천, 김규식 등과 함께 우익계열 민족주의자 세력인 한독당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넓게 보면 범 우익계열 통합집단이지만, 그 실체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의 배타적 민족주주자 결집세력이었다.]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한 후 남북통일정부를 공동으로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좌우합작 7원칙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며 지지하고 나섰고, 좌우합작이 결렬되자 [[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한마디로 좌우합작운동 이후 김구는 오히려 김규식과 다를 바 없는 [[중도우파]] 비슷한 컨셉으로 활동한 것이다. 결론은 김구를 극우파 또는 중도우파로 명백하게 콕 집어서 분류할 수는 없고,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타협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할 순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김구는 소련을 추종해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 활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걍 다 부정적으로 본 것. 김구는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민족을 떠나 노동자끼리 뭉친다는 식의 [[사회주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면모가 보이는 부분. 또한 광복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중국에서 임정에 합류한 사회주의 세력과 별개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국내 사회주의 세력들은 그들과 접점이 닿지 않는 임정봉대에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들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 세력과 합작해 배척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임시정부의 법통만을 내세우는 김구를 극딜하기도 했다. >'''법통(法統)'''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 > [[허헌]][* 다만 당시의 임정 법통 논란은 임시정부만을 독립국가 수립의 주체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공동으로 할 것이냐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임시정부 법통 논란은 [[건국절 논란]]과 연관이 깊지만 광복 이후의 임정 법통 논쟁은 "통일정부 수립의 주체"와 관련이 깊었다. 즉 당시의 임정법통 회의론은 임시정부를 깎아 내리려는 것보다는 임시정부 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발언권과 참여 기회를 주자는 것에 더 가깝다.] 한편, [[이승만]]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이른바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의 수립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였다.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똑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을 원년으로 잡아 민국 연호를 썼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탄핵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군기원]]과 함께,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