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구 (문단 편집) === 종교 ===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 >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위키백과]]에서는 김구의 종교를 [[동학]] -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감리회]])로 나열하여 [[개종]]을 2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외에도 임종 시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고, 광복 직후 전재동포 구호 사업으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원불교]]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교류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불교의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한 기록이 있는 등,[* 원불교 역시 불법에 바탕한 종교로 초창기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그러하듯이 종단으로써는 불교와 별개로 운영되는데 그 구분이 명확해진 것 자체가 한참 뒤의 일이다.] 국민지도자로서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자 했다. 백범이 생애 대부분을 개신교인으로 살았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2004)에는 사망 전 천주교 영세를 받은 내용은 없으나,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한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 ≪마의상서≫를 석달 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 게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893년|19세]] 때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 접주[* 接主, 교주에 이어서 교리를 전파하는 전도사의 개념.]가 되어 700여 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 이후 도피 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을 수계받고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인 [[감리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 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 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 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 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 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할 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이때 혼인 예식은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뤘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 이후부터의 삶 대부분은 개신교인이었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